
나는 이천이백 육십여 년 전 인간 ‘준’이다. 나는 내 이름처럼 지혜로운 아이로 자라나 뛰어난 리더십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했다. 아버지 부왕이 다스렸던 나라를 물려받아 자연과 사람을 경영하는데 어긋남이 없이 평등하고 평화로운 아사달 문화를 열어갔다. 경제와 문화에 관심이 많아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백성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농업과 상업을 장려했다.
우리 조선은 외적의 침입이 잦아서 국방에 힘을 쏟아야 했다. 그래서 강력한 군사력을 키우고 방어 태세를 확립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처했다. 백성들과 함께 국가를 위해 힘을 쏟은 결과 나라가 안정되었다. 고요하게 빛나는 아침의 땅에서 백성들은 열심히 일하고 관리들은 나랏일을 제 일처럼 잘 다스렸으며 나는 백성들이 근심 걱정 없이 잘살 수 있도록 정치개혁에 매진하며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서북쪽으로 영토를 되찾아 확장했다.
그렇게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니 평화로운 시절이 계속되었다. 조선 밖 외국에는 진나라의 진시황이 죽자, 꾀가 많은 유방이 중원을 통일하고 한나라를 건국했다. 그러나 얼마 뒤 우리 조선을 침략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한나라와 우리 조선 간에 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국제관계가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을 무렵 그 틈을 타 한나라의 제후국인 연나라의 벼슬아치 위만이라는 자가 부하 천여 명을 이끌고 우리 조선으로 망명을 신청했다.
“준왕이시여, 저는 연나라 망명인으로서 저의 부하들과 함께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고자 이렇게 간청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신하들을 모아 위만의 망명 신청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거절할지를 의논했다. 그 결과 위만의 망명을 받아들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나는 은혜를 베풀어 위만을 박사로 임명하고 서쪽 변방을 지키는 관리로 임명했다. 위만은 자신이 맡은 지역을 어찌나 잘 지키고 관리를 잘하는지 그의 망명을 받아들인 것에 나는 매우 만족했다.
어느 날 위만은 한나라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정보가 있으니, 자신이 나를 호위하겠노라고 보고서를 올렸다. 나는 충성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위만의 뜻을 허락했다. 나는 위만을 신뢰했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궁궐의 문도 열어주었다. 위만은 군대를 몰고 내가 살고 있는 왕검성으로 왔다. 그런데 위만의 검은 속내를 간과한 것이 문제였다. 사람을 너무 믿은 게 나의 실책이었다. 위만은 차근차근 자신의 세력을 키워서 나를 내쫓을 작전을 짜고 있었다. 이건 역사에 없는 쿠데타였다.
위만의 군사들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궁궐에 있는 신하들과 관리들을 죽이고 나까지 죽이려고 했다. 나는 나를 따르는 몇몇 신하들과 간신히 궁궐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도망쳤다. 이천 년 넘게 이어온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조선이 나를 마지막 왕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국가의 운명이 다 했음을 통찰하고 역사의 흐름을 받아들였다. 착한 백성들과 그 백성들을 잘 관리했던 신하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나는 나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부하들과 난민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가서 새 나라를 세우겠노라고 다짐했다.
바다를 따라 배를 타고 남쪽을 행해 내려오다가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잠시 정착했다. 서아성은 너른 들판이 있어 풍요로운 지방이었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드디어 살기 좋은 만경강 일대 들판이 많은 익산 금마에 도착했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왜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사천리쯤 되었다. 이곳에는 세 종족이 살고 있었는데 하나는 마한이고 또 하나는 진한이며 또 하나는 변한이었다. 모두 옛 진국인데 그중에 마한이 가장 강했다. 나는 마한종족들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마한으로 했으며 나는 마한의 제1대 한왕(韓王)이 되었다.
나는 마한의 왕이 되었지만, 국가다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 54개의 소국으로 된 마한종족을 통일했다. 그리고 강력한 토착 세력인 건마국의 공격이 끊임없이 있었기에 분쟁이 없는 새로운 땅을 개척해 영토를 확장했다. 북쪽에도 토착 세력이 눈을 부릅뜨고 있고 서쪽도 마찬가지였다. 남쪽도 토착 세력이 칼을 갈고 있어서 결국 동쪽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진군했다. 그리고 위만이 한나라와 남방의 진나라에 무역하는 것을 막아 중개무역의 이득을 독점하여 경제를 튼튼히 했다. 또한 흉노족과 연계하여 한나라를 압박했다. 또한 백성들에게 꼭 지켜야 할 법률을 정해 사회 기강을 튼튼히 하고 살기 좋은 나라를 건설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대신 갚게 했으며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고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야 노비를 면해 주었다. 그러나 비록 용서받아 보통 백성이 되어도 법을 어긴 자들은 부끄러움을 씻지 못하여 결혼하고자 해도 결혼 상대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강력한 법을 만들어 놓으니,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아 대문을 걸어 잠그지 않아도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여자들은 음란하지 않고 간음을 하지 않아 정조를 지킬 수 있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땅 금마 태봉산 태봉사에 세 아들의 태를 묻고 백성들을 내 자식처럼 보살폈으며 조선의 후예임을 잊지 않고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하고 단군 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이어나가기 위해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로 세상 이치 밝혔다. 그렇다. 나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마한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 역사의 장대한 서사를 실천한 나는 준왕이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