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 칼럼] 1594년 제1차 한산도 무과 시험

윤헌식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수군을 대상으로 무과 시험을 치르게 해달라고 조정에 건의하여, 다음 해인 1594년 4월 한산도에서 무과 시험이 실행되었다. 이 사실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자세한 내용을 소개한 글이 많지 않아 본 칼럼에서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1593년 12월 전주 무군사(撫軍司: 왕세자 광해군이 있던 분조-分朝)에 있던 광해군은 전주에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의 무사들을 대상으로 과거 시험을 치렀다. 당시 수군에 소속되었던 군사들은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주까지 이동하여 과거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통제사 이순신은 수군이 별도로 진중(한산도)에서 과거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조정에 요청하여 이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이러한 한산도 제1차 무과 시험이 이루어진 배경은 이순신의 장계인 『임진장초』의 「청어진중시재장(請於陣中試才狀)」(1593년 12월 29일)에 자세히 실려 있다.

 

​학자들의 여러 연구 자료(심승구, 「임진왜란 중 무과급제자의 신분과 특성」, 1996; 송준호, 「조선후기의 과거제도」, 1995)에 따르면, 1594년에는 한산도 무과 시험을 포함하여 총 7차례의 무과 시험이 시행되었다. 다음은 1594년에 열린 7차례의 무과 시험이다.

 

1. 1월 25일 경주 별시(別試): 합격자 418명

2. 1월 25일 합천 별시(別試): 합격자 미상

3. 2월 29일 정릉동 정시(庭試): 합격자 174명

4. 4월  6일 한산도 별시(別試): 합격자 100명

5. 6일  2일 제주 별시(別試): 합격자 50명

6. 10월 19일 정릉동 정시(庭試): 합격자 195명

7. 11월 23일 정릉동 별시(別試): 합격자 107명

 

​위 7차례의 무과 시험 가운데 1월 25일 경주 별시는 방목(과거급제자 명단)이 현전하므로 합격자 418명의 이름이 모두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나머지 6차례의 과거는 『국조방목(國朝榜目)』이나 현전하는 홍패(과거급제 증서) 등을 통해 극히 일부의 합격자 이름만을 확인할 수 있다. 

 

『국조방목』(1594년 일부 자료) - 자료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임진장초』의 「설무과별시장(設武科別試狀)」(1594년 4월 11일)에는 1594년 4월 6일 한산도에서 열린 무과 시험의 실행 배경, 시험 날짜, 시험 방법, 시험관(試官)과 참시관(參試官) 명단, 합격자 숫자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참시관으로 참석했던 삼가현감 고상안의 문집인 『태촌집』에도 이 장계의 사본이 수록되어 있다. 이 두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한산도 무과에서 합격한 사람은 총 100명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한산도 무과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4년 4월 6일

 

별시를 열었다. 시험관인 나와 우수사(이억기), 충청수사(구사직), 참시관인 장흥부사(황세득), 고성현령(조응도), 삼가현감(고상안), 웅천현감(이운룡)이 시험을 감독하였다.

 

​『난중일기』, 1594년 4월 7일

 

일찍 모여 시험을 보았다.

 

​『난중일기』, 1594년 4월 8일

 

몸이 불편하였다. 저녁에 시험장으로 올라갔다.

 

​『난중일기』, 1594년 4월 9일

 

아침에 시험을 마치고 방(榜: 합격자 명단)을 내다 붙였다.

 

​위 『난중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한산도 무과 시험은 3~4일에 걸쳐 치러진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이 무과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홍패에 관한 언급이 『난중일기』에 두 차례에 걸쳐 나타난 것이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4년 4월 4일

 

아침에 원수(권율)의 군관 송홍득, 변홍달이 새로 급제한 사람들에게 줄 홍패를 가지고 왔다.

 

​『난중일기』, 1594년 9월 13일

 

저녁에 하천수가 계문의 회신과 홍패 97장을 가지고 왔다.

 

​위 『난중일기』의 두 기록으로부터 유추해보자면, 아마 4월 4일에 언급된 홍패는 1~3위로 합격한 성적 우수자들에게 줄 홍패이고, 9월 13일에 언급된 97장의 홍패는 그 나머지 합격자들에게 줄 홍패인 듯하다.

 

1594년 한산도 무과 시험의 방목은 현전하지 않지만, 이때 합격했거나 합격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몇 사람 존재한다.

 

첫째 인물은 녹도만호를 지낸 송여종(宋汝悰)이다. 강항의 문집인 『수은집』에 수록된 송여종의 비명(碑銘)에 따르면, 송여종은 갑오년(1594년) 4월에 실시한 무과에서 을과(乙科) 7번째로 합격하였다.

 

둘째 인물은 전라좌수영 소속 진포(鎭浦) 가운데 하나인 사도(蛇渡)의 군관을 지낸 김붕만(金鵬萬)이다. 그의 이름과 직책은 『임진장초』의 「부산파왜병장(釜山破倭兵狀)」과 『난중일기』(1593년 7월 8일)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에게 발급된 『선무원종공신녹권』이 그의 가문에 현전한다. 『김해김씨대동세보』에 따르면, 그는 경주김씨 문간공파(文簡公派) 분파인 효암공파(孝菴公派)의 파조 김세걸(金世傑)의 손자로서 갑오년(1594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셋째 인물은 의병장으로 활약한 성응지(成應祉)이다. 『임진장초』의 「청상의병제장장(請賞義兵諸將狀)」(1594년 3월 10일)에 따르면 그는 순천 교생(順天校生)으로서 수군에서 2년간 복무했고, 『창녕성씨족보(昌寧成氏族譜)』는 그가 무과에 급제했다고 기록하였다. 『난중일기』의 1594년 8월 29일 기록은 그가 이날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였다.

 

 

[참고자료]

심승구, 「임진왜란중 무과급제자의 신분과 특성」, 『한국사연구』 제92호, 1996, 한국사연구회

송준호, 「조선후기의 과거제도」, 『국사관논총』 제63집, 199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전종합DB, 고상안(高尙顔)의 『태촌집(泰村集)』 권6, 「부록(附錄)」

한국고전종합DB, 강항(姜沆)의 『수은집(睡隱集)』 권4, 「묘갈(墓碣)」-「증우윤송공비명(贈右尹宋公碑銘)」

『김해김씨대동세보(金海金氏大同世譜)』

『창녕성씨족보(昌寧成氏族譜)』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4.12.06 10:14 수정 2024.12.06 10:39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2025년 4월 24일
2025년 4월 23일
2025년 4월 22일
나는 지금 '행복하다'
2025년 4월 21일
2025년 4월 20일
2025년 4월 19일
2025년 4월 18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6일
2025년 4월 15일
2025년 4월 14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2일
2025년 4월 12일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