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의 우리말 찾기] 왕고모

이봉수

지금은 거의 사라진 우리말 가운데 '왕고모'라는 말이 있다. 왕고모는 아버지의 고모인데 고모할머니라고도 부른다. 접두사 '왕'이 붙으면 '높다' 또는 '크다'라는 의미가 있다. 

 

왕고모는 고모 중에 높은 고모이고 큰 고모다. 왕고모는 아버지와 3촌간이니 나와는 4촌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다. 할아버지의 누이인 왕고모가 친정집에 오는 날이면 대가족 전체가 반기고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 세대는 왕고모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어머니의 절대적 영향권 아래서 자라는 아이들은 이모는 알아도 친고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부장적 질서는 해체되고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면서 생겨난 자연적 현상이지만 왠지 씁쓸한 느낌이 든다.

 

'왕'자 붙은 말 가운데 왕벌이 있다. 왕벌은 제일 큰 벌인 말벌의 방언이다. 말벌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벌이 왕벌이다. 땅속에 사는 땡삐와는 비교도 안되게 큰 녀석이 왕벌이다. 왕개미도 개미 중에서 제일 덩치가 큰 종을 일컫는 말이다. 소먹이던 목동들이 왕개미를 잡아 보라색 도라지꽃 속에 넣어 흔들면 개미산이 나와 도라지꽃이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한국의 리트머스시험지 역할을 왕개미의 도움으로 도라지꽃이 해낸 경우다.

 

왕거미도 가장 큰 거미를 말한다. 개미와 벌들은 온종일 일을 하지만 왕거미는 곤충들이 다니는 길목에 큰 거미줄을 쳐놓고 빈둥거리며 논다. 노동집약적인 일보다는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이라는 그물을 치고 지식 집약적 일을 하는 놈이 왕거미다. 거지 대장을 왕초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동물들처럼 재미있는 경우다. 인맥이 넓은 사람을 왕발이라고 하는데, 이들 중에는 대부분 속 빈 강정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사람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왕인 시절이 있었다.

 

고려를 세운 사람이 왕건이고 그의 성은 왕 씨다. 서양의 중세 봉건시대 절대왕조에 비견되는 고려의 왕은 절대적 존재였다. 비록 무인들의 쿠데타로 왕은 수모를 겪었고 국교인 불교의 타락으로 나라가 망했지만 왕(王) 씨들의 유전자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성씨 중에 전(全), 윤(尹), 옥(玉) 등은 '임금 왕'자가 변형된 것으로 왕 씨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왕이 얼마나 높고 큰 존재였으면 우리말 속에 왕고모와 같은 말이 생겼을까. 지금은 사라져가는 말이지만 그립고 애틋한 우리말이다. 왕고모부는 자신의 장인인 내 증조부님 생일이 되면 왕고모를 앞세우고 새벽에 술 두루미를 지고 고개 넘어 삼십 리 길을 걸어서 오셨다. 어릴 적 왕고모님 집에 가서 몇 날 밤을 자고 놀다가 왔던 추억이 아련하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https://yisoonsin.modoo.at

 

작성 2024.12.06 11:32 수정 2024.12.0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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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