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이천구십삼년 전 인간 ‘클레오파트라’다. 지중해와 맞닿아 사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이집트 북부 해안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위대한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하고 그의 향수가 짙게 배어있는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를 가로지르는 나일강의 거친 물줄기가 카이로를 지나 지중해 북부로 흘러들어 바다와 만나는 비옥한 텔타 지대의 끝자락에 있다. 이 땅에서 무려 3백 년 동안이나 이집트를 다스린 가문의 파라오인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와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5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내 이름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클레오파트라로 어머니의 자상함과 지혜로움이 담긴 뜻을 이어받았다.
나는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의 일원답게 체계적이고 위엄있는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리스 소피스트인 필로스트라토스로부터 그리스 철학과 웅변술을 배웠다. 그뿐만 아니라 일찍이 여러 언어에 관심이 많아 메로이트어, 히브리어, 아랍어, 시리아어, 메디아어, 파르티아어도 배워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이집트어는 큰 뜻을 두고 각별히 배워서 익혔다는데 사람들은 이집트어를 할 수 있는 최초의 프톨레마이오스인이라고 신기해했다. 나는 한때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 속했던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영토를 되찾으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여러 나라의 언어쯤은 익혀놔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전천후의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고 리더십 있는 여성으로 성장해 갔다. 내 나이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그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나는 우리 가문의 법대로 열세 살이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고 로마가 우리의 결혼을 보증해 달라고 부탁했다. 폼페이우스는 이를 승인했고 나와 동생은 이집트의 공동통치자로 왕위에 올랐다. 어린 남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섭정을 맡은 환관 포티노스는 총명하고 영리한 내가 계속 집권하면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걱정해 나를 쫓아낼 음모를 꾸몄다.
정치적 야욕이 매우 강한 나는 남편 프톨레마이오스가 미덥지 않아서 무시하고 배척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나와 프톨레마이오스 사이는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세력과 내 세력은 서로 부딪히게 되고 내전이 발발하고 말았다. 나는 나를 따르는 세력들과 힘을 합해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세력과 싸웠지만 패배하고 알렉산드리아서 쫓겨나 사막 지대에서 병력을 규합해 때를 기다렸다. 공교롭게도 로마의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내전 중이었던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오면서 상황이 묘하게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망명 의사를 밝혔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폼페이우스의 망명 목적이 이집트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것을 염려해 죽이고 말았다.
나는 카이사르와 사절단으로 소통하며 지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왕족 여성들과 불륜을 즐기는 바람둥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직접 보기 위해 궁전으로 들어가는 침대 자루 안에 묶여 은밀하게 들어갔다. 물론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알았는지 프톨레마이오스는 내가 카이사르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군중을 선동해 소요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곧 들켜 카이사르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나의 매력에 반해서 이전처럼 나와 프톨레마이오스가 공동통치를 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면서 또 다른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는 키프로스에서 통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카이사르가 나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다고 여겨 잔뜩 불만을 품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폼페이우스 살해를 주도한 혐의로 환관 포티노스를 처형하자 반감은 극에 달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르시노에 4세와 동맹을 맺고,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이끌고 온 병력이 적다는 것을 이용해 나와 카이사르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민들을 선동해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고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악전고투 끝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카이사르와 나만 남게 되었다. 나는 카이사르의 연인이 되는 대신 군대를 얻고 이집트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받았으며 명실상부한 여왕으로 당당하게 등극했다.
나는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고 카이사르 파라오라는 칭호를 주었다. 카이사르는 본처인 칼푸르니아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나는 실전의 영웅이며 민중파 정치가이고 뛰어난 문인인 카이사르의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아들을 통해 로마를 통치하려고 했지만, 카이사르가 정적에게 암살당하는 바람에 나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집트와 프톨레마이우스 왕가가 다시 불안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로마와 이집트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야망을 꿈꾸고 강력한 세력의 중심에 있던 안토니우스를 선택해 그를 유혹했다. 그는 결국 처자식을 버리고 나와 결혼했다.
안토니우스는 내 소유의 초호화 배에서 왕실 생활을 즐기기 시작하고 자기 부하들을 통해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에서 파르티아인들을 몰아내도록 지시했다, 안토니우스는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를 나에게 다시 돌려줄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었기에 나는 그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의 영향력이 실현되어 킬리키아와 키프로스가 내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운명의 악티움해전에서 대패한 안토니우스 해군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자 나는 도망치다가 측근들과 함께 무덤에 숨고 작전상 안토니우스에게 목숨을 끊었다는 전서를 보냈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에 절망한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배를 찔러 겨우 숨통이 남아 있는 채로 내가 죽었다는 무덤으로 왔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의 동료 중 가이우스 프로쿨레이우스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말을 남기고 명예롭게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바로 그 프로쿨레이우스가 무덤에 잠입해서 나를 포위했다. 그는 내게 금은보화와 함께 불타 죽을 용기조차 없냐고 비아냥거렸다. 나는 호송되기 전에 안토니우스를 나와 함께 이집트의 전통 장례법에 따라 안장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이제 가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이집트 여왕답게 의관을 갖추었다. 그리고 과일바구니에 독사를 숨겨와 침대에 두었다. 독사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나는 8월 10일 39세로 생을 마감했다.
“사랑은 인생의 가장 강력한 힘이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