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에게 철학의 옷을 입혀놓으면 시는 실체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밀란 쿤데라의 시가 그렇다. 저기 유럽 구석에 있는 체코에 실체적인 시인 밀란 쿤데라는 철학의 옷을 입은 시인으로 각인되어 있다. 체코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우리는 밀란 쿤데라는 알고 있다. 밀란 쿤데라를 떠올리면 체코슬로바키아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로부터 독립한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인위적으로 합쳐져서 체코슬로바키아가 된 것이다. 1993년 1월 1일에 평화적으로 두 민족은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개의 공화국으로 갈라서 분리 독립하게 된다.
그렇다. 우린 체코나 슬로바키아를 잘 모른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동유럽에 관한 지식이 미천하기도 한 탓이다. 그런데 밀란 쿤데라는 다 안다. 그의 문학은 우리의 젊은 날과 함께 살아왔다. 신화가 된 그의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슬픔’을 읽지 않고 젊음의 시대를 건너오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되 인간을 뛰어넘는 실존의 역사는 체코를 넘어 유럽을 뒤흔드는 존재의 무기가 되었다. 그 지난한 역사의 기차를 타고 우리도 서사로 얼룩진 들판을 건너지 않았던가.
밀란 쿤데라는 소설을 쓰기 전에 먼저 시를 썼다. 그의 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사이 어디쯤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조를 띠고 있다. 유행하는 사조 따위에 관심 두지 않고 자기만의 개성 있는 언어로 명쾌한 시를 써냈다. 언어 장난을 일삼으며 횡설수설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사소한 것에도 세심하게 의미를 부여하며 삶의 열쇠를 찾는 시에 마음을 두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이 바로 그런 시다. 지금 우리나라는 시인이라는 명함을 개나 소나 갖고 있다. 돈 많고 시간 많고 정신적 사치를 누리고 싶은 사람들은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돈으로 산다. 말은 안 하지만 문단은 이미 돈장사에 눈이 멀어 있다. 밀란 쿤데라가 말한 ‘시인이 된다는 것’을 읽고 시인은 사유하고 존재하게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그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
그 전엔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
왜냐하면 삶이라는 셈이 그대에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게 계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어린애처럼 작은 곱셈구구단 속에서
영원히 머뭇거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
시인이 된다는 것은
항상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모름지기 시인은 이래야 한다. 사유의 머리채를 잡고 끝까지 가보아야 한다. 그 끝이 어딘지는 몰라도 된다. 시인은 고통도 사랑하고 기쁨도 사랑하고 절망도 사랑하고 죽음도 사랑하고 급기야 사랑도 사랑해야 한다. 시인이니까. 시인은 그런 존재로 거듭나는 존재니까. 그게 시인이니까 그래야 한다. 시인은 정신의 집을 짓는 목수다. 끝까지 집을 지어 완성해야 하는 존재다. 집을 짓기 위해 관찰하고 몰입해야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있다. 그 정신의 집에 황제도 살고 거지도 살고 뛰어난 사람도 살고 부족한 사람도 산다. 시인이 된다는 건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1929년 불운한 시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조국이 소련군에 의해 점령당한 후 시민권을 박탈당하자, 이념의 열차를 타고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다. 1989년에 체코가 민주화가 되자 귀국하고 다시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가 이념의 롤러코스터를 타든 문학의 배를 타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는 시로 우리를 위로했고 소설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으며 시대가 주는 고통의 한가운데서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운 정신의 전사인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한다. 그의 작품을 사랑한다. 힘들고 지칠 때, 어디에도 마음을 둘 곳이 없을 때, 죽고 싶을 만큼 고독할 때 나도 시인처럼 끝까지 가보고 싶은 열망이 인다. 그가 나에게 말한다. 인생 끝까지 가보라고, 마음 끝까지 가보라고.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