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KBS '진품명품'을 시청하던 중, 한 백자 술잔에 눈길이 멈췄다. 마치 달빛을 옮겨 담은 듯 은은하게 빛나는 그릇은 조선시대의 계영배(戒盈杯)였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백자 술잔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지혜는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까지 깊은 울림을 전해주었다.
계영배는 그 이름처럼 '가득 참을 경계하라'는 깊은 뜻을 품은 이 특별한 술잔은 조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보물이다. 계영배는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잔의 일정한 수위를 넘으면 술이 새어나가도록 만든 잔으로 절주배(節酒杯)라고도 한다. 잔에 술을 따르면 70퍼센트 지점까지는 잘 담기다가 그 선을 넘어서면 모든 술이 밑으로 쏟아져 버리는 신비한 잔. 그 안에는 말굽 모양의 관이 숨겨져 있어 대기압과 중력의 차이로 이러한 ‘사이펀’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공자가 주나라 환공(桓公)의 사당을 찾은 적이 있는데 생전의 환공께서 늘 곁에 두고 보면서 스스로의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이 '의기'(儀器)를 발견했다고 한다. 환공은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 불렀다. 공자도 이를 본받아 곁에 두고 스스로를 가다듬었으며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인 규남 하백원과 도공 유명옥이 계영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도공 유명옥의 이야기는 교훈적이다. 그는 왕실의 진상품을 만들던 경기도 광주분요에서 뛰어난 재주로 이름을 날렸으나 그 명성에 취해 방탕한 생활을 하다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 스승을 찾아가 참회한 끝에 계영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 신비로운 잔의 이야기는 조선 최대의 거상 임상옥의 일화와 함께 더욱 빛을 발한다. 의주의 작은 장사꾼으로 시작했던 임상옥은 뛰어난 상술과 판단력으로 점차 부를 쌓아갔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성공 뒤에는 계영배의 가르침이 있었다.
거상 임상옥의 수중에 들어간 계영배에 얽힌 전설은 이렇다. 처음 이 잔을 받았을 때 계영배의 참뜻을 알지 못한 임상옥이 술을 계영배에 몇 번이나 담아도 모두 사라지자 진노하며 요망한 물건이라 하여 잔을 깨버리고 만다. 그러자 그 안에 혼을 담은 도공 유명옥도 함께 죽어 임상옥이 크게 뉘우쳤다는 전설이 있다. 그 순간 그는 잔속에 숨겨진 비밀을 발견했다. 넘치려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이 잔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지혜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 임상옥은 이 계영배를 늘 곁에 두고 자신의 욕심을 다스렸다. 그는 장사를 할 때도 이익을 적정선에서 조절했으며 흉년에는 곡식값을 올리지 않고 오히려 백성들을 도왔다.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즉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아야 한다는 그의 좌우명은 바로 이 계영배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그는 조선의 명상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이 오래된 격언은 계영배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과유불급의 교훈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건강을 위한 운동도 지나치면 오히려 몸을 망가뜨리고 자녀에 대한 사랑도 과하면 그들의 성장을 저해한다. 학습도, 여가도, 심지어 선행조차도 적정선을 지킬 때 가장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한 지인은 건강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오히려 건강을 해친 경우다. 건강을 위해 시작한 운동이 점차 과도한 수준이 되었고, 무리한 등산과 지나친 건강식품 복용으로 오히려 몸을 상하고 말았다. 결국 의사는 그에게 '적당한 운동'을 처방했다. 너무 넘치지도 너무 모자라지도 않는 중용의 길을 찾으라고 말이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경쟁하고 채우라고 부추긴다. 우리는 마치 끝없이 높아지는 마천루처럼 욕망을 쌓아 올리지만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재산, 더 화려한 명예, 더 높은 권력을 추구하는 그 끝없는 욕망은 결국 우리를 공허하게 만들뿐이다. 하지만 계영배는 조용히 속삭인다. "그대, 거기서 멈추세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게 바로 중용의 미덕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부족함과 넘침 사이의 그 완벽한 균형점을 찾는 지혜다.
‘무소유’를 남긴 법정 스님은 연꽃잎에 맺힌 이슬방울을 보며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슬방울이 연잎에 고이다가 어느 순간 연못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계영배처럼 자연스러운 비움의 미학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자연은 언제나 그렇게 스스로 적정선을 찾아간다. 우리의 삶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채우되 넘치지 않게, 가지되 욕심내지 않게, 성취하되 교만하지 않게 말이다.
임상옥이 그러했듯 우리도 각자의 마음속에 작은 계영배 하나쯤은 두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꼭 실제 술잔일 필요는 없다. 마치 등대가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에게 안전한 길을 알려주듯 우리의 마음속에 '적당함'의 기준을 세우는 것, 과함을 경계하는 작은 울림을 간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계영배의 정신일 것이다.
노자는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하다"라고 했다. 계영배는 바로 그 만족의 경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사계절이 서로를 밀어내며 끊임없이 순환하듯 계영배는 채움과 비움의 순환을 통해 개인의 욕심을 다스리고 마음을 다스리는 데 사용되는 자기 성찰의 메시지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술잔에 무엇을 채우든 그 70퍼센트 선을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다. 그곳이 바로 충만함과 절제가 만나는 지점이며 지혜와 행복이 공존하는 자리다.
오늘도 나는 텔레비전에서 본 그 계영배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인생은 마치 이 고요한 잔처럼 비워야 할 때를 알고 절제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라고. 그리고 그 지혜야말로 우리 선조들이 이 특별한 잔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가장 소중한 유산이 아니었을까.
[가재산]
한류경영연구원 원장
한국디지털문인협회 부회장
미얀마 빛과 나눔 장학협회 회장
저서 : 『한국형 팀제』, 『삼성이 강한 진짜 이유』
『10년 후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 『아름다운 뒤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