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공 이순신의 1597년 『난중일기』에는 그의 둘째 백의종군 시기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해 4월 1일 이순신은 옥문을 나와 백의종군 길에 올랐다. 4월 5일에는 고향 아산에 이르러 선산과 조상의 사당에 들러 곡을 하였으며, 이후 바닷길로 나아간 어머니 변씨 부인을 기다리다가 4월 13일에 어머니의 부음을 전해 들었다. 백의종군 길에 오른 와중에 어머니의 상을 당한 이순신은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관을 준비하고 빈소를 차리는 등 손수 장례를 진행하였다. 4월 15일 어머니 변씨 부인을 입관하는 날에는 천안군수가 찾아와 장례 일을 도왔는데, 아래는 그 일이 서술되어 있는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15일
늦게 입관을 하였다. 몸소 일을 맡은 오종수가 정성을 다해주니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잊기 어렵다. 부관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으니 이는 다행이다. 천안군수가 들어와서 길 떠날 짐을 꾸렸다.
[원문] 晩入棺. 親執吳終壽盡心 粉骨難忘. 附棺無悔 是則幸也. 天安倅入來治行.
* 부관: 장례를 지낼 때 사용되는 명기(明器) 및 용기(用器) 등과 같은 부장품을 말한다. 명기는 무덤 부장용으로 만들어진 물품이고 용기는 고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물품이다.
위 기록의 원문에 보이는 ‘治行’이라는 표현은 ‘길 떠나기 위한 짐을 꾸리다.’라는 의미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조선시대 문헌을 검색해보면 쉽게 이 표현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장례 과정에서 길 떠나기 위한 짐을 꾸렸다는 것은 영구를 실을 수레를 준비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음날인 4월 16일 일기에도 '영구를 수레에 싣고 본가로 돌아왔다.'라는 내용이 나타난다.
영구가 실릴 수레를 준비하는 일은 보통 친척이나 같은 마을 사람이 담당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위 기록에 언급된 천안군수는 충무공 이순신과 친인척이거나 친분이 있는 관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천안군의 읍지인 『영성지(寧聖誌)』(영성은 천안의 옛 지명 가운데 하나이다.)에 수록된 이즈음의 천안군수 명단을 살펴보면 재임 순서대로 이암(李巖), 정호인(鄭好仁), 김은휘(金殷輝) 등의 이름이 나타난다.

『선조실록』의 기사(권56, 선조27년-1594년 10월10일 갑인 6번째 기사)에 따르면 이암은 1594년에 천안군수에서 청주목사로 관직이 바뀌었으며, 김장생의 문집 『사계전서』에 수록된 김은휘의 행장에 따르면 김은휘는 1599년에 천안군수가 되었다. 즉, 1595년부터 1598년까지의 천안군수는 정호인임을 알 수 있으며, 위 『난중일기』에 언급된 천안군수와 같은 인물로 판단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1596년 이몽학의 반란 때 천안군수 정호인이 반란군 진압을 위해 군병을 지원했다는 기록이 나타나므로 『난중일기』에 언급된 천안군수가 정호인임은 거의 틀림없다.
『진양정씨공대공파대동보』에 따르면 정호인은 진양정씨 공대공파 파조 정장(鄭莊)의 7대손으로서 그의 자는 극기(克己), 생몰년은 1551년~1622년, 군수를 지낸 이력이 있다. 정호인 신상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그의 혼인관계이다. 대동보에 기록된 그의 첫째 부인의 신상을 살펴보면 그녀의 본관은 풍산(豊山), 생몰년은 1550~1592년, 아버지는 유중영(柳仲郢), 할아버지는 유공작(柳公綽)이다. 즉, 정호인의 첫째 부인은 그 유명한 서애 유성룡의 여동생이다. 유성룡의 문집 『서애집』에도 정호인에게 준 「옥산야음증정극기호인(玉山夜飮贈鄭克己好仁)」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정호인의 첫째 부인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얼마 뒤 둘째 부인을 맞이했다. 『진양정씨공대공파대동보』에 따르면 그의 둘째 부인은 충무공 이순신의 둘째 형인 이요신(李堯臣)의 딸로서 그녀의 생몰년은 1575~1634년이다. 『덕수이씨세보』에도 이요신의 딸이 군수 정호인과 혼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요신과 유성룡은 나이가 동갑일 뿐만 아니라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정호인의 혼인관계가 이요신과 유성룡 두 사람의 친분관계와 관련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진양정씨공대공파대동보』에 따르면 정호인은 첫째 부인에게서 3녀를 얻었고, 둘째 부인에게서 5남 1녀를 얻었다. 대동보에 기록된 정호인의 첫째 아들 정백순(鄭百順)의 생년이 1597년이므로 정호인이 이요신의 딸과 혼인한 시기가 1594에서 1596년 사이임을 추정할 수 있다. 1597년 4월에 있었던 충무공 이순신의 어머니 변씨 부인의 장례를 천안군수 정호인이 도왔던 이유가 그의 혼인관계를 통해 규명된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송익필(宋翼弼)의 『구봉집(龜峯集)』 권8, 「가례주설이(家禮註說二)」-「상례(喪禮)」
한국고전종합DB, 김장생(金長生)의 『사계전서(沙溪全書)』 권8, 「행장(行狀)」-「숙부천안군수부군행장(叔父天安郡守府君行狀)」
한국고전종합DB,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8권, 「선조조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선조조명신(宣祖朝名臣)」-「이신의(李愼儀)」
한국고전종합DB, 『서애집(西厓集)』 별집권1, 「시(詩)」-「옥산야음증정극기호인(玉山夜飮贈鄭克己好仁)」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영성지(寧聖誌)』
『진양정씨공대공파대동보(晋陽鄭氏恭戴公派大同譜)』
『덕수이씨세보(德水李氏世譜)』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