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동주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시인 윤동주와,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짧은 생애를 담은 잔잔한 영화다. 동주와 몽규는 소싯적부터 동고동락하며 공부하고 끝내 함께 별이 되어 버린. 기구하다면 기구하고 낭만적이라면 낭만적인 운명 공동체였다.
몽규와 동주는 제국주의 이념과 세계 전쟁 때문에 시름하는 세태 속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서도,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다. 동주는 시인으로서 인간 본연의 감정과 공명해 미약하지만, 주변 사람들 마음에 꺼지지 않는 촛불을 켜는 방식으로. 몽규는 타고난 카리스마와 다져진 현장 경험을 통해 보다 전략적이고 대대적으로 힘을 모아 세상을 바꾸려 혁명 하고자 한다.
몽규의 결의는 제국주의자들에게 발각되어 일찍이 좌절하지만, 동주와 몽규, 그리고 조선인 청년들은 모두 다가오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변절하지 않는 마음을 함께 지켜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들의 짧지만, 찬란한 청춘의 단막극은 우리에겐 익히 알려진 이야기지만,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뭇 진지하고 열성 어린 마음으로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는 이들의 인문 정신이 그립기 때문이다.
끝내 광복을 맞이했지만, 아직도 분단과 이어지는 전쟁 트라우마로 우리는 이 땅에 나고 자라 진지하게 사유하고 고민할 것들을 뒤로 미룬 채 선진국을 따라가기에 급급했으니. 우리는 물신을 숭배하고 인간다움이란 것을 송두리째 어딘가에 두고 온 사람처럼 ‘도파민 중독’에 매몰되어 살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쇼츠(Shorts)처럼 짧고 얕게 소비되는 문화 속에서, 깊게 사유하여 한 문장을 빗어내는 데에 절실한 동주와, 자신의 미숙함을 디딤돌 삼아 ‘길이 있으면 알려달라’ 어른들에게 간절하게 청하여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개척해 나가는 몽규를 보고 있자니 그들이 헤었을 별밤 같은 미래에 우리는 얼마나 화답하고 있는지. 영화를 보는 내내 어떤 반성 어린 마음이 일었다.
오늘날 반쪽짜리 한반도에 살면서 우리는 물리적 전쟁을 멈췄지만, 전쟁에 준하는 낭자한 정신 상태 속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속되는 사회 격차 문제와 정치 파문, 그리고 이어지는 인재와 재해 등을 보건대, 많은 전문가는 현재 우리나라가 많이 아프다는 진단을 일관되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윤동주와 송몽규처럼, 자기 생각을 지켜내고 그것을 신념으로 안고 안아 살아가는 힘은 과연 어디로 흩어졌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게 내심 궁금했다. 각자 내면의 빛으로부터 시작된 작은 변화가 언젠가 모여 시대를 바꾼다는 동주의 말은, 오늘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중에서.
영화 속 혹한의 시대는 겉모습만 다르지 지금 우리네 사는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한 인간이 고고한 정신을 유지하는 일이 작금엔 더 힘들어졌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진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슬픈 천명을 타고난 존재이기에. 앞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도 앞으로 걸어 나가려면,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 영화 <동주>는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오늘날 핵 개인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같이 마음 나눌 친구 한 명 곁에 두기도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다. 혹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지만, 결국 그를 외친 싯다르타는 수많은 제자를 거느려 수행하다 입적했다. 결국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것이다.
섬세한 감성을 타고 태어나 남에게 쓴 시를 보여주기를 어려워했던 부끄럼 많은 청년 동주의 시는, 끝끝내 주변 사람들의 열망과 수호로 세상에 나온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문학 작품이 되었다. 이 부끄럼 많은 이의 시집도 결국 그의 시를 좋아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켜낼 수 있었다.
동주와 몽규처럼, 서로 행동하고 나아가는 방식이 달라 대립하기도 하고 서로를 서운하게도 하지만, 결국 내가 아닌 다른 곳에 친구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존엄을 살펴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처럼 우리 존재에 대해 진지한 의문을 품지 못하는 이유는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은 혼자가 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지탱하려는 노력만이, ‘나’라는 유약한 존재를 벗어나 강한 정신을 유지할 유일한 길일 테니. 부처가 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진정한 실현은 모든 존재와 벗이 될 수 있는, 즉 서로 다른 우리가 등불처럼 연대하는 일 아니겠는가.
[임이로]
칼럼니스트
제5회 코스미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