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의 영화에 취하다] 겨울잠

최민

따뜻하다. 영화가 이렇게 막 따뜻해도 되는 건가. 내가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젊은 시절의 절망이 있다. 그 절망을 안고 강을 건넌다.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니까. 다 그렇게 이겨내면서 어른이 되니까. 물 흐르듯이 시간이 흐르듯이 펼쳐지는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거기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 굳이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그냥 우리의 이야기를 펼쳐 놓은 듯 자연스럽다. 이런 영화가 참 그리웠다. 때 묻은 마음을 헹궈내기에 아주 좋은 영화다. 

 

대학생 ‘구병’은 문득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도망하고 싶었다. 남쪽으로 가기로 했다, 삼일이 걸리든 오일이 걸리든 남쪽으로 가면 모든 일이 잘될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정했다’는 독백을 하며 떠난다. 구병은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여행을 계속한다. 그러다가 체력적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군산에서 자전거를 팔아서 집으로 돌아갈 기차표를 사려는 결심을 한다. 어느 낡은 자전거포에 들어가 자전거를 팔겠다고 하자 다 떨어진 중고 자전거는 돈이 안 된다며 고물상에 가보라고 한다. 

 

횡단보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구병에게 자전거포에서 봤던 노인이 다가와 자전거를 사줄 테니 자기 집으로 가서 밥 한 끼 먹고 가라고 제안한다. 구병은 망설이다가 승낙하고 노인의 집으로 가는데 길에서 만난 동네 사람들에게 구병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구병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노인의 행동에 그냥 그러려니 했다. 허름하고 초라한 산비탈 노인의 집에서 식은 밥을 먹고 있는데 느닷없이 노인은 칼을 꺼내 구병의 손에 쥐어주며 몸에 좋은 영지버섯까지 준다.

 

노인은 소주를 마시면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 준다. 뱃일을 하면서 고래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빛나는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감이 넘쳤던 자신의 과거와 만나고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떠날 채비를 하는 구병에게 이웃들에게 인사나 하고 가라며 삿갓다방으로 데려간다. 노인은 다방 냉장고를 뒤져 술병을 들고 달아나고 마담은 노인이 건네준 칼은 노인의 빛나는 젊은 날의 훈장 같은 것이라며 털모자와 교환하자고 한다. 마담은 구병과 함께 술병을 들고 도망친 노인을 찾지만 보이지 않자 구병에게 ‘아버지 술은 반병만 드세요’라고 시킨다. 구병은 갈등하다가 진심을 다해 ‘아버지 술은 반병만 드세요’라고 외친다. 

 

노인은 구병을 위해 소주 반병만 먹고 자전거포에서 오만 원을 빌려 구병에게 건네며 차비하라고 한다. 노인은 기차역에서 구병을 보내며 쓸쓸하게 뒤돌아서려는데 그런 노인을 바라보던 구병은 마트에 달려가 소주 다섯 병을 사 온다. 그리고 아껴서 먹으라는 말을 남기도 떠난다. 군산 대야역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던 구병 뒤로 커다란 고래를 잡던 어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우연이 아버지와 아들이 된 구병과 노인을 뒤로하고 ‘겨울잠’은 막을 내린다.

 

젊은 구병과 노인의 짧은 만남은 강렬했다. 두 세대가 가지고 있는 외로움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이 섬세하게 표현된 영화다. 그저 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노인과 그냥 아들이어도 괜찮은 젊은이의 고독은 우리의 고독이다. 누구나 안고 살아가는 그 고독은 보는 내내 따뜻했다가 슬펐다가 속상했다가 하며 감정의 소용돌이를 쳤다. 누군가는 과거의 영광에 취해 살고 또 누군가는 미래의 불안을 안고 산다. 술이 노인의 구원이라면 자전거는 구병의 구원이다. 이 둘은 술과 자전거라는 구원을 가지고 만났지만 이제 겨울잠을 깨고 봄날을 만날 것이다. 술과 자전거는 구원이 아니라 겨울잠이다. 이제 술과 자전거를 마음에 묻고 새봄을 만날 것이다. 

 

나는 구병을 연기한 구교환을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눈빛에 묘한 삶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배우다. 연기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마음에 꾹꾹 담아 놓은 고독과 절망을 과장 없이 잘 풀어내고 있다. 대단한 내공을 지닌 배우다. 노인을 연기한 문창길도 참 연기 잘하는 배우다. 배우를 의식하지 않고 영화를 본다면 그냥 그곳에 사는 시민이 영화에 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독립영화가 주는 즐거움이 이런 것인가 보다. 군산이라는 소도시의 느린 풍경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어부들의 모습, 고향이라는 지독한 향수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가슴 저 밑바닥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먹먹한 감정일 것이다.

 

‘겨울잠’이 이렇게 가슴 따뜻하고 멋진 말이었나 싶다.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좋은 영화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돈타령 하지 않고 영화에 온 힘을 쏟는 사람들이 좋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는 좋은 시설에서 편안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인정 받아 상도 받고 살림살이가 나아지길 바래본다. 영화관람료가 높다고 난리를 치면서 몇십만 원을 술집에 박는 사람들도 ‘겨울잠’을 보면 술집에 박은 돈이 아깝게 느껴질 것이다.

 

독립영화 ‘겨울잠’은 2012년에 미쟝센단편영화제 희극지왕 부문에 상을 받았고 같은 해 전북독립영화제 우수상을 받았다. 2013년에는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 출품했고 같은 해 인디포럼과 정동진독립영화제에 출품해서 많은 호응을 받았다. 영화는 관객이 생명이다.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다. 독립영화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관객이라는 무기밖에 없다. 관객과 호흡하는 영화, 관객인 내가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닌가 착각하게 하는 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 삶을 성찰한다. 그 힘으로 또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규병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에게 외친다.

 

“아버지 소주 반병만 드시래요”

 

 

[최민]

까칠하지만 따뜻한 휴머니스트로 

영화를 통해 청춘을 위로받으면서

칼럼니스트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공부하고 

플로리스트로 꽃의 경제를 실현하다가

밥벌이로 말단 공무원이 되었다. 

이메일 : minchoe293@gmail.com

 

작성 2025.01.21 10:09 수정 2025.01.2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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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