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말이나 어떤 형상으로 표현되는 순간 그 내용은 증발하듯 사라진다고 했던가. 촛불이나 모닥불 아니면 산불의 불꽃 연기처럼 또는 이슬방울이나 폭포수 아니면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 물안개처럼 아무 흔적도 없이. 이는 거품경제니, 옷이 날개라는 식의 포장이니, 소리만 요란하다는 빈 수레와는 달리 속이 익고 찬 사람은 겉치장이나 겉치레로 입에 발린 빈말 립서비스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일 게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물론이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골리앗 장수와 다윗 소년’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전태일 열사, 그리고 모조품 같은 픽션이 아니라 진품의 실화 같은 ‘로미오와 줄리엣’ 등 말과 글 대신 그들의 행동과 삶과 그리고 죽음 자체로 인류의 사표가 된 수많은 경우에서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최대가 아닌 최소로 축소해서, 말하자면 일종의 ‘미니멀리스트’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형이상학적인 고차원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사랑은 차치물론且置勿論하기로 하고, 형이하학적으로 최저선인 육체적 욕정의 대상으로서의 제 눈에 안경이란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 같지 않은 말도 좀 해보리라.
요즘 중국에선 평평한 절벽 가슴으로 고민했던 여성들이 중국판 웨이보에서 ‘평면가슴대회’를 열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최근 중국 여성들이 저마다 웨이보에 ‘평면가슴대회’라는 태그를 걸고 자신의 평평한 가슴을 찍은 인증샷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고 중국 포털 왕이 뉴스 등이 전했다. 이 대회는 지난 2014년에도 중국 인터넷에서 진행되었는데 우승자를 뽑는 것이 목적이 아닌 ‘인증대회’라고 한다. 남성이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성임을 증명할 수 있는 목선이나 입술을 함께 공개하는 규정이 있다.
많은 여성 네티즌들이 자신만 가슴이 작은 게 아니라는 점에 위로받았다고 하니 부모가 준 몸매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중국에서 얼마 전엔 여성의 외모에 대한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색적인 ‘겨드랑이털 사진 콘테스트’를 개최해 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행사를 주도한 중국의 여성운동가는 우리는 몸에 나는 털을 밀지 안 밀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고 수 많은 여성들이 동참했다.
이와는 반대라 할까 아니면 대조적이라 할까. 최근 뉴욕 브루클린에선 ‘작은 성기 대회’가 열린 가운데 한 남성이 우승했다. 이곳 킹스카운티살롱 식당에서 제3차 ‘작은 성기 대회’ 결선이 진행되었는데 위스콘신주에서 온 테일러 캠벨(24)이 수백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상금과 함께 우승 트로피를 받았다. 그는 매력적인 여친도 있는 매력남이라고 한다. 이 대회는 세계 어느 나라 남자도 참가가 가능하고, 작은 성기를 보여주는 비디오만 제출하면 된다.
이 대회 주최자로 알려진 제시 레빗은 이 대회는 단순히 사이즈 작은 피니스를 비교해 가릴 뿐만 아니라 참가자의 자신감과 용기도 평가한다고 주장했다는데 모름지기 마땅히 고추의 매운맛 강도와 밀도 내지 밀도와 당도의 지구력이 사이즈나 뭣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미였으리라. 어떻든 청소년 시절 내가 사춘기, 아니 조숙했었는지 조로했었는지 몰라도 일찍 맞은 사추기에 서울 동대문 밖 보문동과 창신동 사이에 있던 채석장 돌산에 올라 백운택이란 친구와 함께 밤이 깊도록 부르던 가곡 ‘이별의 노래’(박목월 시 김성태 곡) 후렴 가사 그대로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인데 어떤 길이나 밀도가 무슨 상관이랴.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에서 말이어라. 문득 이우걸 시인의 ‘기러기’가 떠오른다.
죽은 아이의 옷을 태우는
저녁
머리칼 뜯으며 울던
어머니가 날아간다.
비워서 비워서 시린
저 하늘 한복판으로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천추 아니 만추의 한이 된 얘기 하나 해보리라. 1970년 직장업무로 일본에 출장 갔다가 일을 다 보고 하루 이틀 틈이 나서 당시 열리고 있던 오사카 엑스포를 관람한 후 유서 깊은 교토와 나라로 향했다. 신칸센 급행열차를 타고 역에 내려 역 앞 광장에서 두리번거리다 마침, 내 옆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 있는 아가씨에게 내 서툰 일본말로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잠간만 기다리라며 자기가 기다리던(잠시 후 알게 되었지만 언니 되는) 사람과 몇 마디 주고받은 다음 언니를 보내고 나서 아가씨가 자청해서 일일 관광 안내해주겠단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했던가. 뜻밖에 아리따운 아가씨의 이런 호의를 어찌 거절하고 사양할 수 있으랴.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황홀하도록 달콤한 하루가 순식간에 저물 무렵 금상첨화라 할까 자기 집으로 저녁초대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언제 친구들을 불러 모았는지 혼자 사는 자기 집에서 다 함께 깔깔대며 화기애애하게 저녁 식사 후 밤늦게 기차역 플랫폼까지 전송받고 우리는 헤어졌다. 밤기차로 동경에 도착, 다음 날 아침 하네다 공항에서 나는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할 때까지 나는 일본 아가씨가 헤어지면서 내게 건네준 종이쪽지를 손에 꼭 쥔 채 무진히 고민했다. 아가씨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이 쪽지를 어쩔 것인가. 꿈꾸듯 아가씨와 하루를 같이 지내면서도 나는 처자식이 있는 기혼자라는 사실을 아가씨에게 밝히지를 못했다. 아가씨가 물어보지도 않는데 말하기도 그렇고, 또 한편으로는 잠재의식적으로 내가 미혼자 싱글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미치도록 안타깝고 후회막심의 유감천만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지 않아도 2년 전 서울에서 나는 신문 기자직을 버리고 ‘해심’이란 이색 대폿집을 차려 친구 손님, 손님 친구들과 취생몽생하다가 어느 날 밤 만취 상태에서 부지불식간에 한 아가씨와 하룻밤을 지낸 뒤 도의적인 책임을 진답시고 그 아가씨와 천신만고 끝에 결혼했으나 서로 맞지 않아 가정이 불화하면서도 애들 때문에 마지못해 살고 있는 형편과 처지였었다. 그러니 내가 어쩔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과민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 아가씨는 그냥 단지 내게 친절을 베풀어줬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때로서는 전부 아니면 전무이지 내게 다른 선택이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 나는 일본 아가씨의 종이쪽지를 찢어버리고 말았다. 나를 한시바삐 잊게 해주는, 아가씨를 위한 최선책이라고 합리화시켜 나 자신을 달래면서. 지나고 돌이켜 보니 일본 아가씨를 위해서는 최선이었을는지 몰라도 나 자신을 위해서는 최악의 결단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런 후 결혼한 지 채 3년도 못 돼 우리 부부는 성격의 상충은 물론 가치관의 상치로 합의이혼을 하고 보니 아내가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할 수 없이 애들을 위해서라도 더 노력해보겠다고 18년을 더 정말 초인적으로 기를 쓰고 애써본 끝에 두 번째로 이혼, 결혼한 지 20여 년 만에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영웅전 위인전 등을 탐독하고 ‘샘터’ 같은 책에 나오는 세계 명언들을 외우면서 나 자신을 당위성에 끼워서 맞추려고 억지를 많이 써온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to be or not to be’라고 독백했다지만 인생 80년 가까이 살아보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내가 왜 진작 실존적으로 살지 못했을까 한스러울 뿐이다. 그래, 그렇지, 생긴 대로, 가슴 뛰는 대로 살아봤어야 할 일이었다. 하룻밤 아니 한순간 같이 지낸다 해도 순간 찰나이면 찰나인 대로 만리장성을 쌓아 볼 일이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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