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시기 많은 승려들이 의병으로서 활동한 일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특히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의 이름은 역사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와 『난중일기』에도 삼혜(三惠), 의능(義能), 처영(處英) 등 여러 승병장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처영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해보려고 한다.
처영이 승병장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이정귀(1564~1635년)의 문집 『월사집』에 수록된 「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명」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처영은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서 임진왜란 직후 휴정이 보낸 격문에 응하여 호남에서 1천여 명의 승병을 모집해 권율의 막하로 들어갔다.
처영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점은 그의 승병 활동이 당대의 여러 기록에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처영에 관한 기록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음을 보여주며, 그가 승려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활동을 벌였음을 입증한다. 다음은 그러한 대표적인 기록이다.
『난중잡록』, 1592년 9월 22일
전라감사 권율이 군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근왕(勤王)하려고 북쪽으로 달려갔는데, 각 고을 수령과 승장 처영 등이 따랐다.
『난중잡록』, 1593년 2월 16일
행주대첩의 소식이 이르렀으므로 권율에게 자헌(資憲)을, 조경(趙儆)에게 가선(嘉善)을, 승려 처영에게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가자(加資)하고, 모든 장사에게 관직을 차등 있게 내렸다.
『선조실록』 권53, 선조 27년(1594년) 7월 19일 을미 5번째 기사
비변사가 아뢰기를 "남원산성(교룡산성)은 지형이 극히 험난할 뿐 아니라 지역이 경상도와 연접해 있어 한 도의 보장처가 되니 그 중요함이 전주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날에 여러 차례 공문을 보내어 제때 수축하여 급한 때를 대비하게 하였고, 또 의승장 처영에게 승군을 거느리고 형편에 따라 수축하게 하였는데..."라고 하였다.
처영 관련 기록 가운데 행주대첩 참전 기록이 가장 눈부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처영과 승군이 수축한 남원의 교룡산성은 위 『선조실록』의 기록에 언급된 대로 지형이 험난한 곳에 위치하였으며, 지금까지도 그 성벽이 거의 온전히 남아 있다. 역사에 가정은 큰 의미가 없겠지만, 남원성 전투가 교룡산성에서 벌어졌다면 아마 그 결과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위 기록들 이외에 처영이 금산의 이치전투나 수원의 독왕산성에서 공을 세웠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가 권율 휘하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꽤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처영은 『난중일기』에도 등장하는데,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7년 6월 12일
늦게 승병장 처영이 와서 만났다. 둥근 부채, 미투리를 바치기에 물건으로 보상하여 보냈다. 또한 적의 일을 이야기하였고 원공(원균)의 일도 이야기하였다.
[원문] 晩 僧將處英來見. 納圓扇芒鞋 故以物償送. 且言賊事 又言元公事.
위 기록은 충무공이 1597년 백의종군 시기 도원수 권율 막하에 머물 때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아마도 처영이 권율 휘하에서 활동한 연유로 이 시기 두 사람이 만난 듯하다. 위 기록에 따르면 충무공과 처영이 군사에 관한 일을 이야기한 듯한데,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지 않은 점이 매우 아쉽다. 참고로 처영이 충무공에게 바친 물건 가운데 미투리(芒鞋)는 마혜(麻鞋)나 승혜(繩鞋) 등으로도 불렸던 생삼으로 삼은 신발을 말한다.
처영이 승려의 신분이었기 때문인지 생몰년이나 신상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단지 그의 호가 뇌묵(雷默)이라는 것과 어릴 때 금산사에서 출가했다는 것만 몇몇 기록에 전한다.
[참고자료]
한국고전종합DB, 조경남(趙慶男), 『난중잡록(亂中雜錄)』
한국고전종합DB, 이정귀(李廷龜), 『월사집(月沙集)』 권45, 「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
국립민속박물관, 2005년, 『한민족역사문화도감-의생활』, 국립민속박물관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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