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책무는 무엇인가?
시인의 책무에 관한 명문화 규범은 없다. 대체로 시 정신과 시인 정신을 말할 때, 시인의 책무를 언급하곤 한다. 대체로 시인의 책무를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말을 빛나게 하는 일. 둘째, 만상을 수렴하는 일. 셋째, 사회 현상을 비판하는 일. 넷째, 삶을 성찰 일. 다섯째,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 등이다.
평자가 가장 많이 언급하는 책무는 첫째이다. 우리말을 빛나게 하는 일은, 우리의 사라진 언어, 죽어 가는 언어를 발굴하여 빛나게 하고, 시적 조어造語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우리 문법에 맞게 시를 써야 한다는 의미이다. 시 창작에서 파격을 허용하는 수준을 벗어나 국적 불명의 번역체 문법으로, 과도한 문법 해체로, 우리말의 순수성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우리 모국어로 쓰는 시에 외국어와 외래어를 무분별하게 채택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말과 우리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둘째, 만상을 수렴하는 일은, 우주 현상, 자연 현상을 꿰뚫어 들여다보고, 인간 삶의 현상에 만상을 겹쳐 놓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셋째, 사회 현상을 비판하는 일은, 사회 현상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모순을 진단하고, 비판하는 일이다. 넷째, 삶을 성찰하는 일은, 삶과 죽음을 사유하여 삶의 성찰과 깨달음을 안겨 주는 일, 존재론적 사유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다. 다섯째,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은, 자유로운 창조적 상상력으로 새로운 시적 생명체를 발견하고, 역동적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다. 이는 지각과 기억에만 의존하는 재생적 상상력에서 탈피하여 창조적 상상력으로 시를 창작하는 일이다.
가장 중요한 시인의 책무는 우리말을 빛나게 하는 일임을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곽재구의 시 「전장포 아리랑」에 들어앉은 일본어 시어 ‘산마이’에 주목해 본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이다. 전남 신안군 임자도의 전장포에 시비도 있다. 김관식의 칼럼·평문집 『문화·예술인의 자세』(2025)에서도 비판한 시 한 편을 읽어 본다.
아리랑 전장포 앞바다에
웬 눈물방울 이리 많은지
각이도 송이도 지나 안마도 가면서
반짝이는 반짝이는 우리나라 눈물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우리나라 사랑 보았네
재원도 부남도 지나 낙월도 흐르면서
한 오천 년 떠밀려 이 바다에 쫓기운
자그맣고 슬픈 우리나라 사랑들 보았네
꼬막껍질 속 누운 초록 하늘
못나고 뒤엉긴 보리밭길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멸치 덤장 산마이 그물 너머
바람만 불어도 징징 울음 나고
손가락만 스쳐도 울음이 배어나올
서러운 우리나라 앉은뱅이 섬들 보았네
아리랑 전장포 앞바다에
웬 설움 이리 많은지
아리랑 아리랑 나리꽃 꺾어 섬그늘에 띄우면서
- 곽재구, 「전장포 아리랑」 전문
인용 시 11행의 “산마이 그물”에 주목해 본다. 일본어 발음의 원칙상 ‘さんまい(三枚)’를 ‘산마이’로 발음하지 않는다. ‘삼마이’로 발음한다. 그러나 한국의 어부, 노동자들이 노동 현장에서 통상 ‘산마이’라고 발음한다. 이는 세 장, 세 겹, 삼중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산마이 그물”은 ‘삼중 그물’, ‘세 겹 그물’을 의미한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삼중 그물’도 아닌 ‘산마이 그물’이라는 일본어가 버젓이 자리 잡은 인용 시를 볼 때면, 대한민국 시인의 의식 수준뿐만 아니라, 교과서 심의 위원의 의식 수준도 알 수 있다. 일본어를 무조건 거부할 일은 아니다. 적어도 미학적으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워야 할 글의 예술 시에 우리말을 옥죄는 일본어가 자리하면 곤란하다는 의미이다.
이런 우리말을 옥죄는 시는 함량 미달일 수밖에 없다. 이런 함량 미달의 시가 국어 교과서에 실린 자체만으로도 온몸에 열이 찬다. 일제 강점기에도 지켜 낸 우리글 우리말이다. 이렇게 천대해도 괜찮은 일인가?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대구과학대학교 겸임조교수, 가야대학교 강사.
저서 : 평론집 9권, 이론서 2권, 연구서 2권, 시집 5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