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기영 작가(1941 ~ )는 제주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후 1975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였다. 한국문학사에서 제주도의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언급할 경우 가장 먼저 꼽히는 인물이다.
4월 3일은 제주에서 가장 비극적인 날이다. 4·3봉기가 일어나던 해 육지에서 파견된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자행한 무자비한 탄압은 “앉아서 죽느니 일어서서 싸우자”라는 항쟁으로 이어졌고 군대까지 가세하면서 처참한 대학살 극이 벌어졌다. 작가는 인간의 탈을 쓰고 할 수 없는 짓을 인간이 인간을 향해 저지른 엄청난 비극적 상황을 직접 보고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까운 친인척 중에는 일부는 좌익이고 일부는 우익으로 작가의 일가친척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가 당시 아무리 비극의 땅이었다 하더라도 작가에겐 성장의 요람이었다. 개울가에서 물장구치고 철없이 잠자리를 잡아 날개를 뜯거나 개구리를 잡아 다리를 부러뜨리기도 한다. 바다에서는 파도에 몸을 싣고 함께 둥실 떠오른다. 항상 즐거운 놀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느 농촌 아이처럼 죽도록 싫지만, 부모님을 도와야 하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현기영 작가가 성장기를 매우 풍요롭고 아름답게 묘사한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자신의 자전적 소설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주인공은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만 네 살이 되도록 코를 흘려 돼지코를 목에 달고 다니던 시절, 아버지가 정신병 때문에 밖으로 나돌기만 하자 어머니는 외가로 가 버리고 주인공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품에서 자란다.
농사일로 바쁜 조부모에게서 따스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병이 나은 아버지는 국방 경비대에 입대했지만, 집에 들르는 일은 여전히 거의 없다. 얼마 후 4ㆍ3사건으로 인해 고향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살아남은 이들은 공포와 긴장 속에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픔의 기억은 점점 사라지고 주인공은 동무들과 함께 물놀이하거나 곤충을 잡거나 하면서 성장한다.
한국 전쟁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에서는 중학교 입학 후, 아버지가 딴 살림을 차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돌아올 것을 권하는 편지를 쓰면서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중2 되던 해, 어머니의 갖은 노력으로 드디어 우리의 집을 짓게 되었고, 그 몇 달 뒤 아버지가 돌아왔다. 오랜 부재를 깨뜨리고 나타난 아버지는 낯설었으며 실패자의 모습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주인공에게 미움의 대상이었으며 고3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까지 빼앗기자 단식 투쟁을 하며 아버지의 사과를 받아 낸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영정 사진을 대하며 사진 속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이 닮아있음을 느낀다.
이 작품은 제주도를 배경으로, 유년의 기억을 대장간, 종기, 전깃불, 유리구슬, 도깨비, 전투놀이, 항복받기 놀이, 돼지 코 등의 소제목 아래 옴니버스 형식으로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소년과 자연과 마을이 함께 주인공이 되어 어린 개구쟁이들과 어울린다. 이 어린아이들이 사춘기 소년으로 자라날 때까지 시간은 4ㆍ3 사건과 6ㆍ25 등의 큰 사건들과 겹치면서 역사와 함께 흘러가는 개인사를 구성하는데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작품은 시작된다. 어른이 되자 서술자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늘 가족 곁을 떠나 있던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부정 그리고 화해를 그리고 있다.
정당하지 못한 국가권력과 이념의 대립으로 뭐가 뭔지도 모르는 마을 동네의 친구들이 산으로 피난을 가고, 옆 동네 친구의 아버지는 육지로 징병을 떠난다. 같은 이웃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권력에 저항한 도민들은 무참하게 학살당하고 오름 주변, 관덕정 주변, 비행장 주변에 대량으로 묻힌다.
책에서 작가는 본인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고 있다. 그 시대의 제주 모습, 척박한 땅 제주, 칙간의 똥 돼지, 산에서 흘러온 지하수가 퐁퐁 솟는 푸른 용연, 용연에서 헤엄치며 노는 작가의 어린 시절, 그 시대의 관덕정, 작가의 고향으로 묘사되는 노형리의 불타는 함박이굴, 한라산으로 피난을 가는 피난민들, 부재하는 아버지, 외로움에 눈물을 자주 흘리던 작가의 모습, 그 시대의 비극을 겪었지만, 성장해 가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가는 모습이다.
작품의 숟가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품 속에 나오는 세 개의 숟가락, 아버지의 임종 장면의 숟가락, 4·3사건 때 관덕정에 매달린 이덕구의 주검에 꽂힌 숟가락, 콩밭을 매며 두려워했던 꽁무니에 뿔리린 귀양살이 벌레의 운명처럼 될까 두려워하는 숟가락. 바로 이 숟가락들의 공통점은 비루하고 처참했던 삶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념의 대립 속에서 격동기를 겪으면서 가정답지 않은 가정에서 성장하는 아이, 그 안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아이에게 크나큰 정서적 결핍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은 모습에서 아버지의 성기를 보며 생명을 생각하고 결국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대목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 없는 현재와 미래는 없다. 제주 4·3봉기가 주는 교훈은 우리가 관광도시로만 알고 있는 제주도의 아픔과 시련이 있었고 그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치유하고 화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갈까. 숟가락 하나에 그 사람의 삶과 발자취가 모두 담겨있다. 죽어서도 숟가락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는 삶, 숟가락은 지나고 보면 왜 그리 치열하게 싸우고 미워하고 살았는지에 대한 삶의 허무를 말할 수도 있고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용서일 수도 있다.
[민병식]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시인
현) 한국시산책문인협회 회원
2019 강건문화뉴스 올해의 작가상
2020 코스미안뉴스 인문학칼럼 우수상
2022 전국 김삼의당 공모대전 시 부문 장원
2024 제2회 아주경제 보훈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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