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성 짙은 유행가 아랑가를 곡성(哭聲)처럼 절창하는 가객 정태춘이, 전통 골동품을 펼쳐 놓은 인사동 거리를 <인사동>으로 풍각(風角) 했다. 여기서, 풍은 바람이 아니라 각설이다. 각도 뿔이 아니라 음계의 하나로 봄이 적절하리라. 오음계 궁 · 상 · 각 · 치 ·우~의 각이다.
이런 노래를 각설이타령, 일명 장타령 場打令이라고도 하는데, 인사동이 골동 풍물시장이니 퍽 어울린다.
장승 하나 뻗쳐 놓고 / 앗따 번쩍 유리 속의 골동품 / 버려진 저 왕릉 두루 파헤쳐 / 이놈 저놈 손 벌린 돈딱지 / 쇠죽통에 꽃 담아 놓고 / 상석 끌어다 곁에 박아 놓고 / 허물어진 종가 세간살이 / 때 빼고 광내어 인사동~
양코쟁이 게다신사 납신다 / 문 열어라 일렬종대 새치기 마라 / 푸대접 신세 물 건너가니 / 침 발라 기름 발라 인사동 / 푸대접 신세 물 건너가니 / 침 발라 기름 발라 인사동~
대중가요 유행가 아랑가 <인사동>이 품은, 메시지는 우리의 5천 년 역사 자국이 배어있는, 골동품에 돈 때가 묻어 있음을 풍자한 곡조다. 노랫말도 멜로디도 토속의 향기를 머금고 있다. 허물어진 종가의 처마 밑에서 세상 속으로 굴러 나온 세간살이들.
참 잘 버무렸다. 7백여 미터의 장바닥을 셋 골목까지 누빈 흔적이 절절하다. 천천히 걸어가는 길가 눈길이 멎던 곳곳이 눈에 아련하다. 노랫말 속의 양코쟁이는 서양 사람들, 게다신사는 일본인들이다. 그들의 재잘거림이 낯설지 않은 것은 왜일까. 하지만 노랫말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샛골목마다 펼쳐진 전통 먹거리 판과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민족대표 29인의 목소리를 머금은 태화관은 왜 사설하지 않았을까. 개운하지 않은, 역사의 마디이지만 책갈피 속에 남아 있는 팩트(fact)다. 태화관, 파고다 공원 흥복사, 원각사, 청실
한국대중가요 130년사에 시장을 모티브로 한 첫 노래는 1939년 김해송 이난영의 남편이 부른 <팔도 장타령>이다. 1939년 이러한 풍습을 엮은 곡절이 이 노래다.
‘해주나 감사 삼년에 해가 나서 못 하고 / 연안 백천 인절미는 송도 장꾼이 다 먹고 / 황주봉산 능금 배는 서울 장꾼이 다 먹고 / 신계곡산 머루 다래는 처녀총각이 다 먹네 / 얼씨구두 잘한다 절씨구두 잘한다 / 품바 품바 잘한다~’
<팔도 장타령>, 이 유행가 아랑가는 1절은 이북 장터를 얽은 곡조, 2절은 남쪽을 얽은 듯한데 노래를 찾을 수가 없다. 이 노래는, 풍자 해학적이면서도 지역별로 특산물을 거명(擧名)하였고, 신계곡산 머루 다래와 같은 곡물은 '피부미용관리가 필요한 처녀총각들의 기호한다는 효능의 의미'도 담았다.
다음으로 이어진 장터 노래 1990년대 조영남의 <화개장터>, 2018년 이혜리의 <자갈치 아지매>이다. 우리나라 시장(市場)은,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열린 정기 비정기적인 장터다. 조선 23대 순조 임금 시절, 이러한 장터가 전국에 1,600여 개에 이르렀단다. 이러한 풍습이 대한제국기와 일본제국주의 식민시절, 6.25 전쟁을 거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800년을 전후하여 전국에 시장이 보통 5일마다 열렸는데, 일정한 상인 집단이 다섯 마을을 차례로 이동하며, 시장을 열었다. 이것이 5일장이고, 간격은 30~40리 정도였단다. 이 시장에서 시장으로 이어지는, 30~40리마다 느티나무를 심어서 이정표로 삼기도 했단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마침내 매일 열리는 상설시常設市가 열린다. 이곳에는 봇짐장수 보상, 褓商이나 등짐장수 부상, 負商을 비롯해 객주(客主)와 감고(勘考)도 활동했다.
이중 객주는 상인들을 상대로 하는 상인, 즉 도매상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보름 · 열흘 · 닷새 · 사흘 등 일정하지 않았으나, 후기에 들면서 오일장이 자리 잡았다. 세계적으로 상인(商人)은, 장사를 하는 뜨내기로 친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가로질러 다니면, 대상隊商, caravan이라고 했고, 히브리어의 상인이라는, 의미 케나안 케나니는, 가나안 가나안 사람을 뜻한다.
상인이라는 말은, 중국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서기전, 1122년 이후에 유래한 상(商)나라 사람이라는 뜻이다. 상나라는, 주나라에 의해 멸망했는데, 이때 주나라는 상나라를 깎아내리기 위해, 수도였던 은(殷)을 나라 이름으로 불렀다.
주나라가 선 이후 상나라 사람들, 즉 상인들은 정치 공직에서 배제되어, 하는 수 없이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상나라 사람이라고 하면, 곧 '떠돌이 장사를 하는 사람이란 뜻'이 되었고, 역시 같은 뜻으로 상업(商業)은 '상나라 사람들의 직업이란 뜻'으로 장사를 의미했다.
인사동(仁寺洞)은, 서울 종로구에 있는 법정동이다. 어진 사찰(절)이 있던 곳? 하지만 아니다. 과거 관인방의 ‘인’과 대사동의 ‘사’를 합쳐서 붙인 말이다. 오늘날 안국동 로터리로부터 종로2가 탑골공원까지를 말한다. 길이 0.7km의, 너비 12m의 길이다. 이 길은 2000년에 돌걸상과 돌의자, 남인사 물동이 북인사 물길 등으로 단장한 거리다. 이곳에, 거의 모든 가게는 오래된 책이나 사진, 서예, 기념품, 사진, 도자기, 목제품, 보석 등을 취급한다. 도자기들은 신라 질그릇부터 조선백자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것들을 풍자한 유행가가 <인사동>이다. 이곳에 있는 태화관(泰和館)은, 일제강점기에 있던 술집으로, 광화문에 있던 요리집 명월관의 분점이다.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27호, 태화빌딩 자리다. 태화관은 이완용의 별장이었지만, 그가 이주한 후 명월관이 인수했단다. 1918년 화재로 명월관이 없어지자, 안순환은 이곳에 태화관을 열었다.
이곳에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를 제외한 29명이 집결하여, 오후 2시부터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영향으로 태화관이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가 되었는데, 손병희는 태화관 마담 주옥경과의 친밀도가 장소 선정의 이유였단다. 1919년 3월 1일 12시, 한일강제병합조약의 무효와 대한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26대 고종 임금 '대한제국 초대 황제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독살(毒殺)되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인산일 因山日, 장례식인 1919년 3월 3일에 맞추어 미리 서울로 모여든 사람들과 한반도 전역에서 동참한 사람들의 민족 봉기 운동이다. 그 당시 임금의 장례는 40일 장이었고, 기간 중 시신은 동빙고와 서빙고에 보관 중이던 얼음으로 보존했었다.
태화관의 모체, 명월관明月館은 1906~년경 대한제국 황실 궁내부 주임관으로 있으면서, 궁중요리를 하던 안순환이 종로구에 개점한 조선요리집이다. 세종로 139번지, 동아일보 광화문사옥.
1909년 대한제국의 공식기생제도인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궁중 기녀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영업이 번창했다. 6.25 전쟁 때는 북한군의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국군의 북진반격으로 북한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불을 지르고, 주인 이종구를 납북해 간다. 2층 양옥집이었는데, 면적은 대지 1천2백 평에 건축면적 6백여 평이었다. 1층은 일반석, 2층은 귀빈석이었으며, 매실이라는 특실도 있었다.
천재 시인 천상병의 부인 문순옥이 운영하던 찻집, ‘귀천’도 <인사동> 노래에 얽었으면 얼마나 푸졌을까.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필명을 심온(深溫)으로 쓴, 천상병은 1967년 동백림사건 독일, 동베를린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여의 옥고와 고문을 겪었으며, 1993년 지병인 간경화로 인해 타계하였다. 그가 치룬 옥고의 죄는 친구 강빈구에게 막걸리 값으로 5백원, 1천원씩 받아썼던 돈이 공작금이었다는 것.
그 후 1972년, 그의 손목을 잡은 평생 인생반려가 친구 여동생인~ 문순옥 여사이다. 그들은 소설가 김동리의 주례로 백년가약을 맺었었다. 문순옥은 천상병이 1993년 지병인 간경화증으로 의정부시 장암동 자택에서 타계할 때까지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인사동>을 절창한 정태춘은, 1954년 평택 팽성면 도두리 출생이다. 평택고를 나온 가수 겸 사회운동가, 음유시인이다. 가수 박은옥이 그의 평생 동반자다. 그는 1990년대초부터 음반사전심의폐지운동을 전개하여 1996년 헌법재판소에서 승소한 장본인이다. 그해 그는 아내와 함께 대한민국 민족예술상을 받았다. <시인의 마을>, <촛불>, <북한강에서>, <떠나가는 배> 등으로 대중들과 소통한다. 그는 가출소년이었다. 밀양의 목욕탕 보일러 화부 일도 하고, 목포, 울릉도, 제주도로 떠돌기도 했었다.
자유 예술혼을 품은 자들이여 세상에 없는 나만의 꿈을 향하여 가출을 하시라. 그리고 세상을 품으시라. 가수 남인수, 남진, 조용필, 작곡가 박시춘도 가출을 한 예술가들이다. 기업인의 신화, 정주영 어른도 가출 소년 장남이었다.
그 길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새길, 나만의 길을 찾아가는 Blue Road이다. 100명과 경쟁을 통하여 최고를 지향하는 길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경쟁을 통한 최초를 개척하는 길이다. 이 길은 코스미안의 길...
[유차영]
한국아랑가연구원장
유행가스토리텔러
글로벌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경기대학교 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교수
이메일 : 51944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