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흥렬 칼럼] 움이 트는 이 계절에

곽흥렬

세월의 흐름은 한 치의 어그러짐이 없이 언제나 한결같다. 해가 뜨면 다시 지고 달이 차면 반드시 기울듯, 세월이라는 나그네도 대순환이란 필연 속에 갇혀 그 발걸음을 한시도 멈추지 아니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봄이다. 봄! 아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려 온 계절인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만 같았던 동장군의 기세가, 우수 경칩을 지나면서 납작 엎딘 채 소리도 없이 스멀스멀 뒷걸음질치고 있다. 수채 물감을 풀어놓은 듯 하루가 다르게 번지는 따스한 연둣빛 봄기운에 녀석은 목덜미가 꺾이어 결국 케이오 패 당하고 만 것이다.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으리” 

 

이렇게 읊은 셸리의 시구를 대자연 속에서 다시 만난다. 정녕 더할 나위 없는 환희요 축복이다. 설사 가진 것이 적다 할지라도 마음만은 한껏 여유로워지는 시절, 이것이 사계의 시작인 봄이 지니는 의미가 아닐는지…….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이른 아침 출근길에 차창으로 번지는 성에가 불편하게 시야를 가려 놓았었다. 그러하더니, 그새 창문을 반쯤 내려도 살갗에 실려 오는 바람결이 한결 훈훈한 느낌으로 다가든다. 무겁고 칙칙한 털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산뜻한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 싶어진다. 

 

심술쟁이처럼 변덕을 부려대던 지난 시절, 가로수들은 이따금 한 자도 넘는 눈을 이기도 하고 윙윙대는 갈퀴바람을 맞기도 하면서 수도승의 모습으로 묵묵히 견디어 왔었다.

 

그 가로수 가지가지마다 고사리손 같은 움이 세상일의 궁금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뾰족뾰족 고개를 내밀고 있다. 자투리땅 여기저기 말끔하게 단장된 소공원에도, 주택가의 나지막한 담장 너머에도 개나리며 라일락이며 목련이 또 그들대로 새롭게 맞은 봄기운에 망울을 한껏 부풀린 채 흐드러질 채비로 분주하다. 곧이어 별무리를 닮은 오종종한 꽃송이들이 시샘하듯 저마다의 고운 자태를 뽐낼 것이다. 신의 손재주로 빚어내는 불가해한 작품들, 이것이 참으로 기적이 아니고 또 무엇이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서 우주 공간에 미만彌滿해 있는 절대자의 섭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섭리 하나를 찾으려고 온전히 생애를 걸고 몸부림치며 헤매었던가. 그 가운데 더러는 큰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오도송悟道頌을 남기기도 했지만, 그보다 몇천몇만 배나 많은 구도자들은 안타깝게도 보일 듯 말 듯 찾길 듯 찾길 듯 애태우는 진리에의 목마름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덧없이 스러져 갔으리라. 

 

눈이 부시도록 화사한 이 계절에, 한 생명 한 생명이 저마다의 의미를 달고 새로이 생겨남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다. 우리 사는 세상에서 생명이란 것만큼 소중하고도 소중한 가치가 또 어디 있을까. 이 생명을 다시금 피어나게 하는 봄, 봄이 정녕 은혜로움은 소생蘇生에 그 까닭이 있을 것 같다. 새로이 생겨남의 기대가 없다면 거기엔 필시 깊디깊은 절망만이 존재하리라. 소생에의 꿈을 노래 부를 새봄이 있기에, 빛이 닿지 않는 바닷속 같은 아득한 침묵의 시절을 꿋꿋이 참아낼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새 생명의 찬가 앞에, 우중충한 회색빛 시절 내내 마음 한구석이 우울해 있던 사람들의 눈빛에도 비로소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곱게 숨죽이며 기다려 와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맞이한 희망의 계절,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이건만 바라볼 때마다 늘 새롭다는 느낌이다. 시인이 아니어도 모두가 시인이고 싶어지고, 연인이 아니어도 서로가 연인이고 싶어지는 시절이 바로 이즈음이 아닐는지……. 살아 있음이 눈물겹도록 행복함을 이 계절과 마주할 적마다 실감하곤 한다. 

 

드디어 봄이 발밑까지 바짝 다가와 섰다. 이 봄을 의미 있게 붙들어 두기 위하여, 나는 내 몫으로 허여된 삶을 부지런히 가꾸어 가고 싶다. 지금 이렇게 주어진 봄이 꿈결처럼 흘러가 버리면, 이 한때의 봄은 내 생애에서 두 번 다시 기약할 수 없을 터이기에.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

김규련수필문학상

이메일 kwak-pogok@hanmail.net

 

작성 2025.03.11 10:12 수정 2025.03.1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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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