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숙 칼럼] 직지가 그리는 동심원

민은숙

감탄사를 독차지하는 갓 나온 꽃을 시샘하듯, 바람을 휘돌리는 꽃샘이 물러났다. 병病이 빼앗은 이태가 구멍 낸 감성에 봄이 날아들었다. 볕뉘가 연약한 이파리 정맥을 들여다보는 아침에 집을 나섰다. 추위가 몇 겹 접었던 어깨를 활짝 펴고 한눈판 사이로 용감한 나비가 팔랑인다. 떡 벌어진 느티나무, 발목을 꼭 잡고 올라온 민들레가 앙증맞다.

어쩌면 노란색은 겨우내 고인 눈물샘의 결정일지 모른다. 막힌 샘이 봄빛에 또르르 뚫렸다. 물을 길어 올려볼까. 따스한 동행이 길을 나누니 먼 거리가 짧아진다. 가로수 작은 도서관 입구를 찾았다. 마침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운동 배너 입간판이 버선발로 마중 나와 있다. 설렘이 상기된 문을 연다. 생각보다 넓은 내부에는 수많은 책이 눈을 빛내고 있다. 나도 내 책을 만들 수 있을까. 생경한 기대 심리가 뺨을 달구고, 초등 6학년에서 주저앉은 꿈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꿈은 언제나 뒷방 신세로 밀려났다. 내일을 꿈꾸기엔 짙은 안개마저 내려앉은 미로에 갇혀 음울했다. 막막한 현실에서 벗어나고파 상상의 우산을 폈다. 발등에 불 떨어진 오늘에 삐끗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꿈이 내 몸 외진 구석 어딘가에 잘 숨어있었나 보다. 삶과 죽음의 벼랑 끝에서 모처럼 한숨 돌린 우리는 찻잔을 그러쥔 채 감흥에 젖은 시간을 감싸 안는다.
 


“언니는 꿈이 뭐였어?”
“난, 작가였어. 이상하게 한 번도 변하질 않네.”
“학교 다닐 때 곧잘 상 타지 않았어? 도전해 봐.”
“한참 늦었는데, 되겠어?”
“왜? 될 수 있지. 오늘부터 시작해 봐.”

오래 묵힌 장은 속이 깊어 얕은 솜씨론 흉내 낼 수 없는 감칠맛이 난다. 가슴속에서도 그럴 수 있다면. 오래 품어 아프게 파고들어도 꺼낼 수 없는 날들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감성은 재우고 냉철한 이성을 깨워 숫자에 기민한 직업에 차츰 익숙해졌다. 일상의 트랙에서 겉도는 꿈은 허영의 방조였다. 낙엽을 밟으며 구르몽의 시를 읊고, 쉬는 시간에 울리는 베토벤의 음악에 눈물을 글썽였던 문학소녀는 질곡의 시간에 긁히다가 부서졌다.

2022년 새봄, 우리만의 꿈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 듯 직지가 두 손을 내밀었다. 유럽인의 자존심 ‘42행 성서’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무려 78년이나 앞선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 쏘아 올린 불꽃이 나를 비추기 시작했다. 격려와 응원에 끓어오른 용기로 공모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직지의 상권 上卷이 오랜 세월에 부서진 꿈을 우주에서 찾아내 퍼즐을 완성했나. ‘실패해도 괜찮아. 천천히 마라톤을 완주하자.’고 마음을 다스리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전화가 울렸다. 그토록 오래 묵힌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1인 1책 펴내기 도서관 지도 강사님이 등단한 문인은 책을 낼 수 없다며 수필 창작 교실을 안내했다. 모교인 캠퍼스에 다시 들어서자 감정이 널뛰었다.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 시절엔 퇴근 후 핏발 선 밤눈으로 지식을 팠고, 현재는 맑은 아침의 눈으로 글에 빠지는 것뿐. 직지의 불꽃은 교실에서도 활활 타올랐다.
 

어둠이 감싼 밤하늘에 빛나는 것은 달과 별, 뿐만이 아니다. 문명의 불꽃이 휘황하다. 밀납자에 황토를 발라 만든 주형을 구워 녹이고, 쇳물을 부어 만든 활자를 한 자 한 자 참선하듯 떼어내 손질하고, 조판 작업한 한 권의 책은 불심이 오롯하다. 쇠젓가락을 사용하는 민족의 기술력이자 길이 보전할 세계기록유산이다. 그 강한 자기장의 힘을 입어 문화 재단의 기금을 받아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칠흑이 몰려든다 해도 직지가 어우른 불꽃 아래에선 작은 바람이 꽃을 키워낸다.

 기록이 유난히 환하다. 서점가에서는 단연 화두이다. 이 심지에 불붙인 시발점을 찾아가면 꼭짓점에서 직지를 만난다. 청주에서 실시한 지속 가능한 기록 문화도시 포럼 및 국제 워크숍과 문화도시 100인 원탁회의에 참여했다. 영국의 헤리티지 재단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기록 문화유산의 거울로 청주를 서로 찾고 있다. 관심이 가는 만큼 보이는 것이 있다. 직지에 시선을 모으면 흥덕사와 고인쇄 박물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확장하면 잇고 품는 통합 10주년 대한민국의 심장 청주의 기록문화 보전의 메카 청주 기록원과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와 직지 아카데미가 있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1인 1책 펴내기 운동을 시작한 청주는 올해로 18년째 운영 중이다. 고귀한 역사의 발자취에 변방으로 남고 싶지 않다. 미약한 열정이나마 땔감으로 태우고 싶다. 직지가 불붙인 수혜자인 나는, 마침 저서가 생겨 자격조건을 충족했다. 간절한 염원이 통한 걸까. 서류전형이 통과된 후, 첫 취업 면접 보듯 긴장했던 대면 순간이 떠오른다.

꿈을 오랫동안 그리는 사람은 그 그림에 가까이 가닿는다. 깊숙한 마음의 우물 속에 꿈을 못 박은 채 현실에 충실했던 나를, 직지의 고장 무심천이 젖샘을 푼 엄마처럼, 너른 품을 가진 우암산은 아빠처럼, 낳고 키워 줄곧 돌봐주었다.

직지가 밤하늘에 높이 쏘아 올린 불꽃으로 우주에 박제될 뻔한, 꿈과 이야기를 청주시민들이 책으로 내어놓고 있다. 글을 합평하는 저녁은 불씨인 활자들이 소환한 과거와 만나 울고 웃느라 환한 대낮 같다. 청주는 오늘도 시민들의 아름다운 자맥질에 시퍼런 밤이 뜨거운 심장으로 하얗게 읽히고 있다.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제4회 코스미안상

제3회 문학뉴스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2024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 강사

꿈다락학교 시 창작 강사

문화재단 & 예술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이메일 : sylvie70@naver.com

 

작성 2025.03.19 09:50 수정 2025.03.1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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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