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용 (수필가/철학자)
계몽 혹은 계몽주의로 번역되는 독일어는 ‘아우프클레룽’입니다.
‘아우프’는 ‘위에’라는 뜻의 전치사로도 쓰이고, 접두어로 활용될 때는 ‘열다’의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클레룽’은 ‘클라’라는 부사 내지 형용사를 근간으로 하는 명사형이고, 그 의미는 ‘밝은’, ‘선명한’, ‘명백한’ 등의 뜻을 지닙니다. 열어서 밝혀 준다! 뭐 이런 말이 계몽을 직역한 것입니다.
문제는 주체입니다.
타인의 인도에 따라 자신이 열리고 밝혀졌다면 그것은 계몽주의의 뜻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소위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는 정신, 즉 노예의 정신으로는 계몽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정신머리로는 계몽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여는 것도, 열어서 빛을 선사해 주는 것도, 그 빛의 힘으로 밝혀 주는 것도 모두 주체의 역할에 의존할 뿐입니다.
주체는 자기 자신입니다. 모든 것이 나의 나다움 속으로 집중됩니다.
계몽은 내가 해낸 일입니다. 계몽은 나의 작품입니다. 세상에 빛이 있어 사물이 모습을 드러내듯이, 내면에도 빛이 있어 내 안에서 사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을 내 자신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눈을 감고도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위대한 눈을 가졌습니다. 사람은 눈을 감으며 뜰 수 있는 눈을 가졌습니다. 눈을 감으면서도 뜰 수 있는 눈의 존재는 신비로움 그 자체입니다.
사람은 눈을 가진 동물이면서, 동시에 그 눈은 이성의 힘과 맞물리면서 무궁무진한 영역으로 확대되어 나아갑니다.
세상의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여서도 그 마지막을 넘어서는 끝도 없는 시간 속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또 우주의 영역보다 더 넓은 공간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생각의 힘에 의해 규정되지만, 그 힘이 강한 만큼 시간과 공간 또한 커질 뿐입니다. 그 규정의 범위는 오로지 힘에 의해 결정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만큼 시간과 공간이 탄생해 줄 것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이 사는 세상의 크기가 결정될 것입니다.
얼마나 큰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과 함께 먼 곳에 둔 수평선이나 지평선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감옥살이처럼 한없이 좁은 공간을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 자체가 틀에 박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답답한 정신이 있습니다. 늘 상대를 향해 ‘그게 아니라!’ 하면서 판단을 내리기 일쑤인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칸트는 〈계몽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글을 발표했습니다. 이 글의 집필 시점은 1783년 12월로 기록되어 있지만, 1784년에 《베를린 월간지》라는 잡지를 통해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글은 정말 짧은 글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손바닥만한 문고판을 기준으로 하여도 9페이지를 채우지 못하는 분량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짧은 글이 불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밤하늘의 작은 별 같습니다. 작지만 큰 별임을 깨닫게 해 주는 그런 글입니다.
“계몽주의란 인간이 전적으로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무능함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다. 무능함이란 타인의 개입 없이 스스로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줄 모르는 무능력이다. 만약 그 원인이 오성의 부족이 아니라 타인의 개입 없이 스스로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결단과 용기가 부족해서라면, 이 무능함은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사페레 아우데! 네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그러니까 계몽주의의 모토이다.”
늘 묵상하는 구절입니다.
묵상만이 신을 만나게 해줍니다. 묵상만이 깨달음을 얻게 해줍니다. 묵상을 위해 암기하고 외우고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사페레 아우데! 나의 좌우명들 중의 하나입니다. 나의 메일 주소도 이것입니다.
용기를 내라! 나는 기도를 할 때도 이 말부터 꺼냅니다. ‘하나님, 용기를 주옵소서!’ 하고.
이것이 계몽의 목소리이고 계몽의 의미이며 계몽의 시작입니다.
용기를 내라! 그리고 네 인생을 살아라! 용기를 내면 신명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