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흔히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는 좁은 시야의 사람, 무지(無知)한 사람, 고집쟁이 등 자아도취에 빠져 사는 사람을 일컫는 비유로 사용한다.
『장자』에 대해 장자는 스스로 “짐승들의 말을 빌려 비유하는 우화가 열에 아홉이며, 옛 성인들의 이름을 빌려 비꼬아서 말하는 풍자가 열에 일곱”이고, “도덕과 정치, 법과 경영 등 정언은 승자들의 담론이고 반어와 역설은 패자들의 담론”이라고 말했다. 우언과 중언(重言)에는 역설과 반어적인 표현이 많다. ‘우물 안 개구리’와 관련한 우화를 읽어 본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바다를 말할 수 없으니 우물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요, 여름에만 사는 벌레가 얼음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사는 여름만 시절인 줄 굳게 믿기 때문이며, 촌스런 선비가 도를 말할 수 없는 것은 속된 가르침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네. 그런데 지금 자네는 냇물에서 나와 곧 바다를 보고서 곧 자네의 잘못을 아니, 자네와는 큰 이치를 말할 만하네. 천하의 물 중에서 바다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모든 냇물이 그리로 흘러들어가 영원히 정지하는 일이 없고 그렇다고 또 물이 가득하지도 않네. 미려(尾閭)로 물이 새어 나가 어느 때에 그 새어나감이 그칠 줄은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주 말라 버리는 일이 없네. 봄에나 가을에도 변함이 없고 장마 때나 가뭄에도 아랑곳하지 않네.
-장자』, 「추수(秋水)」, 이석호 역
인용문은 『장자』의 「추수(秋水)」의 일부이다. 장자는 처음에는 우물 안 개구리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물을 품는 바다의 넉넉함을 말한다. 이는 개구리를 내세워 넓은 바다, 즉 넓은 세상을 비유한 것이다.
여름의 풀벌레는 겨울의 얼음을 알 수가 없다. 이는 하루살이가 한 달이라는 시간을 알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작은 물에서 노니는 물고기는 큰물을 알 수 없는 이치와도 같다. 사람도 큰물에서 놀아야 시야가 넓어지고 성찰의 폭이 커진다.
모든 물을 품는 바다의 넓은 품은 자연의 현상이면서 삶의 이치와도 같다. 우리 인간은 늘 우물 안 개구리 신세와 같다. 개구리는 드넓은 바다의 일각마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늘 넓은 품과 시야, 넓게 열린 생각을 품고 살아가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지 말자!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대구과학대학교 겸임조교수, 가야대학교 강사.
저서 : 평론집 9권, 이론서 2권, 연구서 2권, 시집 5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