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진해 학개(鶴浦)가 합포해전지가 될 수 없는 이유

안방준의 은봉전서, 증병조참판정공전 기록에도 학개는 근거 없어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1654년)의 문인 주엽(朱曄, 1596~1638년)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녹도만호 정운(鄭運, 1543~1592년)의 전기 『증병조참판정공전 贈兵曹參判鄭公傳』을 저술하였다. 이 전기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있었던 조선 수군의 여러 전투에 관한 기록을 수록하고 있으며, 이순신 장군이 남긴 『임진장초』의 부족한 부분을 일부 보완해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은 임진왜란 시기 녹도만호 정운 휘하에서 복무했던 흥양(지금의 전남 고흥군) 출신의 무사 오윤건이라는 인물이 구술한 내용을 정리하여 작성한 글이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전투를 직접 경험한 인물의 말을 글로 옮겨놓은 것이니 상당히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주엽은 『증병조참판정공전』을 지은 뒤 이 글을 그의 스승 안방준에게 주었으며, 안방준은 훗날 주엽이 세상을 떠난 뒤인 1644년 『증병조참판정공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부산기사」를 저술하였다. 이후 「부산기사」는 안방준의 문집 『은봉전서』에 수록되었으며, 『은봉전서』는 현재 한글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주요 해전 가운데 하나인 합포해전은 선조에게 보고한 승첩장계인 「옥포파왜병장」에 그 전투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증병조참판정공전』에도 합포해전 관련 기록이 실려 있어서 눈길을 끈다. 어떠한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 관련 기록이 많을수록 바람직한 것이니, 『증병조참판정공전』의 합포해전 기록의 존재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증병조참판정공전』에 실린 합포해전 기록이다. 참고로 「부산기사」에도 합포해전 기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증병조참판정공전』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율포(栗浦)를 지나 영등포(永登浦)에 이르러 잠시 배를 정박하였다. 때마침 왜선 9척이 창원 마산포(馬山浦)에서 웅천의 제포(濟浦: 薺浦의 오기)로 향하는 것을 추격하니 적은 원포(院浦)에 배를 버리고 달아났다. 다시 그 배를 남김없이 불태우고 저녁에 저도(猪島)에 머물렀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의 합포해전 기록은 조선 수군이 전투를 벌인 왜선의 이동 경로를 꽤 자세히 명시하였는데, 이는 「옥포파왜병장」에는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다. 단, 「옥포파왜병장」이 왜선의 규모를 5척으로 서술한 것과 달리 『증병조참판정공전』은 그 규모를 9척으로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 후 저녁에 창원땅 남포에 머물렀다고 했는데 저도에 머물렀다고 한 부분도 서로 다른 기록이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은 합포해전이 벌어진 곳의 지명을 ‘원포(院浦)’로 서술하였는데, 합포해전이 벌어진 곳의 지명을 명시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과연 원포는 지금의 어느 곳을 가리키는 지명일까. 『창원도호부권역 지명연구』(민긍기, 경인문화사, 2000)라는 연구 자료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지리지를 통해 지명 원포의 위치를 잘 밝혀 놓았다. 다음은 그 책에서 해당 내용을 옮겨놓은 것이다.

 

팔현(八峴)은 웅천현에서 창원도호부로 가던 길에 있는 고개이다. 팔현은 『대동지지』에 등장한다. 웅천현에서 서쪽으로 7리에 있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八峴院이 등장한다. 웅천현에서 서쪽으로 7리에 있다고 하였다. 팔현원이라는 원의 이름은 팔현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팔현원의 본래 이름은 發院이다. 발원은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등장한다. 저도리(猪島里)에 발원(發院)이 있다고 하였다. 발원이라는 원의 이름은 발티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팔현원이 있던 지역은 지금은 원포동(院浦洞)이 되었는데 그 지역에 그 곳 사람들이 ‘큰발티’ ‘작은발티’라 부르는 지명이 남아 있다.

 

위 책은 『경상도속찬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 각각 언급된 ‘발원’과 ‘팔현원’과 ‘팔현’을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원포동이라고 설명하였다. 팔현원은 『동국여지지』와 『여지도서』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마찬가지로 ‘웅천현에서 서쪽으로 7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명 ‘원포(院浦)’는 1980년대 지도에서도 확인되는 지명으로서 지금은 이곳에 진해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서서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웅천현의 읍치였던 웅천읍성은 지금도 그 성벽의 상당 부분이 진해구 성내동에 남아있는데, 그 웅천읍성에서 원포가 있던 진해 국가산업단지에 이르는 거리는 대략 3km로서 7리와 거의 비슷한 거리이다.

 

『1872년지방지도』의 「웅천현지도」(자료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지명 ‘원포(院浦)’는 임진왜란 시기 사료인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도 등장한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 1592년 8월 27일

영남우수사와 함께 의논하고 배를 옮겨 거제 칠내도에 이르렀다. 《중략》 저물녘에 제포의 서쪽 원포로 건너가니 밤 2경(9~11시)이 되어 숙박을 하였다. 

与嶺右水伯同議 移舟到巨濟漆乃島. 《중략》 暮渡濟浦西院浦 則夜已二更宿.

 

『임진장초(壬辰狀草)』, 「부산파왜병장(釜山破倭兵狀)」(1592년 9월 17일)

(8월) 27일 웅천땅 제포 뒤 바다 원포에서 밤을 보내고 

二十七日 熊川地薺浦後洋院浦經夜

 

『임진장초(壬辰狀草)』, 「진왜정장(陳倭情狀)」(1593년 8월 10일)

안골포는 성 안팎으로 (왜군이) 가득 차서 지금은 집을 짓고 있으며 선박은 선창 좌·우측으로 대·소선 부지기수가 줄지어 있엇습니다. 그리고 원포로부터 대발치에 이르기까지는 집을 짓고 진을 치고 있으며 대·중선 80여 척이 정박해 있습니다. 제포는 야미산과 도직령이 가리고 있기 때문에 막을 친 수를 살펴볼 수 없었습니다. 

安骨浦 城內外彌滿 時方造家 船隻則船滄左右邊 大小船幷不知其數列泊. 而自院浦至大發峙 造家屯聚 大中船幷八十餘隻浮泊. 薺浦則野尾山刀直嶺遮隔 故結幕之數多寡 看望不得

 

『웅천군읍지』에 수록된 웅천 지도(자료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의 「부산파왜병장」의 기록을 살펴보면, 원포는 웅천 제포(지금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제포성지)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 각각 언급된 팔현원과 팔현의 위치와 대략 부합한다. 또한 『임진장초』의 「진왜정장」에는 원포가 대발치(大發峙)라는 곳과 가까운 곳에 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오는데, 대발치는 『창원도호부권역 지명연구』에 언급된 현재 지명 ‘큰발티’에 해당되는 곳이다. ‘큰발티’는 현재 ‘대발령’이라는 지명으로도 불린다.

 

『1872년지방지도』의 「웅천현지도」는 ‘원포(院浦)’를 ‘대치(大峙)’와 ‘소치(小峙)’라는 산줄기의 아래쪽에 표기하였는데, 이는 『창원도호부권역 지명연구』의 설명 및 『임진장초』의 「진왜정장」 기록과 부합한다.

 

지명 원포는 『호구총수』(1798년 편찬), 『웅천군읍지』 웅천 지도(1899년 편찬), 『경상남도지지조서』(1914년 제작), 『경상남도 지명조사철』(1959년) 에도 그 지명이 등장한다. 요컨대 원포는 조선 전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지명의 위치와 지명의 변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곳으로서, 지금의 진해 국가산업단지에 해당되는 곳임이 명확히 입증된다.

 

충무공은 「옥포파왜병장」에서 합포해전이 벌어진 곳의 지명을 ‘웅천땅 합포 앞바다(熊川地合浦前洋)’라고 서술하였다. 필자는 2021년에 출간된 논문 「합포해전지 위치 비정에 관한 연구」(『문화역사지리』 33-2, 문화역사지리학회, 2021)에서 ‘웅천땅 합포 앞바다(熊川地合浦前洋)’라는 문구가 대략 3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논지를 쓴 적이 있다. 그러한 해석들 가운데 하나는 이 문구를 ‘웅천땅(熊川地)’과 ‘합포 앞바다(合浦前洋)’의 병기로 해석하는 것이다.

 

현재 일부 학자들이 조선시대 합포를 작은 규모의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조선시대 합포는 합포 포구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역과 지금의 마산만까지 아우르는 지명이다. 이는 이미 필자의 논문 「합포해전지 위치 비정에 관한 연구」에서도 자세히 설명한 바이다. 아래는 합포와 합포 앞바다를 현대 지도에 표기한 것이다.

 

 

원포가 있던 지금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원포동은 조선시대 웅천현에 해당하고, 웅천현 앞바다는 ‘합포 앞바다’로 불릴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증병조참판정공전』에 서술된 합포해전지가 「옥포파왜병장」에 서술된 합포해전지와 다르지 않다고 보는 해석도 가능하다. 단, 「옥포파왜병장」에 서술된 왜선 규모가 『증병조참판정공전』에 서술된 것과 서로 다르므로 『증병조참판정공전』의 합포해전 기록은 앞으로 추가적인 고찰을 통해 보다 정확히 검증될 필요가 있다.

 

지금의 학개(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원포동)를 임진왜란 시기 합포로 주장하는 견해가 있는데, 진해 학개는 전혀 조선시대 문헌에서 발견되는 지명이 아니며, 아무리 빨라도 1900년대 중반 이후에 생긴 지명이다. 원포가 상당수의 조선시대 문헌에 등장하는 사실과 비교해보면, 진해 학개 주장의 문제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진해 학개에 관해 코스미안 뉴스에 ‘진해 학개가 합포해전지가 될 수 없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칼럼(https://www.cosmiannews.com/news/339212)을 게재한 적이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은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참고로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관한 연구 자료로는 『고흥 쌍충사 사적』(이은상, 쌍충사중수 추진위원회, 1980), 「이순신과 정운 -녹도만호 정운의 활동을 중심으로-」(조원래, 『이순신연구논총』 11,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9), 「『증병조참판정공전』의 임진왜란 초기해전 기록 고찰」(윤헌식, 『지방사와 지방문화』 27-2, 역사문화학회 2024)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임진장초』나 『은봉전서』, 『증병조참판정공전』모두를 살펴보아도 진해 학개(鶴浦)는 합포해전지가 아니다. 『은봉전서』에 나오는 ‘부산기사’의 저본이라고 할 수 있는 『증병조참판정공전』의 기록은 이순신 장군의 기록과 상당한 차이가 있어 앞으로 여러 사료를 비교 검토하여 추가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https://yisoonsin.modoo.at

 

작성 2025.05.23 11:02 수정 2025.05.2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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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