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모든 분야가 급변하는 시대이다. 예전 시대와는 달리 근래에 와서는 그 속도에 가속도가 붙은 것 느낌이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분야의 발달 과정에서 인간의 사고 영역이 확장되는 것도 하나의 이유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현상 가운데 인간의 사상과 문학과 예술의 발달은 하나의 리듬을 가지고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성과 변화 속, 탄생과 멸망의 순환 고리 속에 인간들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고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대와 더불어 문학과 다양한 예술 분야의 향기는 새롭게 피어 \오를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와 더불어 변해가는 언어의 촉수는 미지의 세계를 더듬을 수 있다.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다. 말인즉슨 이유 없이 바람은 불지 않듯이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 또한 어떠한 계기에 의해서 바람처럼 움직인다. 그러나 기압의 차이가 없으면 바람이 불지 않듯 물의 흐름이 없는 늪지대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 이렇게 멈추고 정지된 것들을 흐르고 움직이게 하려면 어떠한 힘과 계기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패하고 결국에는 사라져 간다. 곧 죽음이다. 공산주의, 커뮤니즘의 사회가 그렇게 망했듯이. 예술에 있어서 매너리즘 또한 그러하다.
이렇듯, 그 시대를 가로지르고, 꿰뚫으면서 쉼 없이 움직이고 앞으로 나아가 폭발하는 추진력이 있어야만 예술의 생명은 활력 넘치는 숨을 쉴 수 있다. 티브이에서 보았던 고흥에서의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릴 때 볼 수 있었던 추진체, 이것이 있어야 더 멀리, 더 높이 비상하듯이, 창작을 생명으로 하는 문학가와 예술가는 타성에 젖고 울타리 안에 갇힌 생각의 틀을 벗어나 지난 시대의 고인 샘물의 둑을 과감히 허물어 새로운 물이 콸콸 넘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플로베르나 발자크 등 리얼리즘의 문학이 황혼으로 저물어 갈 때 20세기 프랑스 문학에 새로운 기풍으로 폭탄처럼 터진 통쾌한 앙드레 지드의 정신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슈르레알리즘에 불을 붙였던, 그러나 사라져 가는 다다이스트들, 이처럼 예술은 그 어떤 흐름의 사조에서 쉼 없이 활동한다. 이럴진대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들만의 관성에 함몰되어 생명 연명을 해 나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현실 또한 그러하다. 특히 갓 입문한 문학가와 예술가들은 새롭고 창의적인 추진력으로 낡삭은 기존 집단의 생태계를 과연 파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때 있다. 과연 그럴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만약 타성과 인습에 매몰된 세대를 파괴해서 해체하지 못한다면 결코 높은 공간으로 쏘아 올려야 하는 인공위성을 점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상으로 낙하하는 운명을 초래할 수밖에.
지금은 극과 극으로 양분된 시대이다. 문학과 예술 분야의 대부분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창조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우리의 문학은 때론 침묵을 깨고 시대를 아파하면서 분노하고 그러면서 폭발해서 솟구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이들 또한 많다. 잘잘못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문학가와 예술가들은 매너리즘에 빠져서 고착되고 화석화 되어가는 양극단의 시대를 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성작가들에 의해 피노키오처럼 만들어진, 그래서 아류일 수밖에 없는 작가들은 이러한 시대 상황을 연소시킬 수 없다. 그것은 용기와 정열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소신과 작가적 세계관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뜬 소문 같고 겉마 화려하 빛 좋은 저널리즘에 현혹되기 쉽다. 제발 떠오르는 동녘의 붉은 태양을 바라보면서 저무는 서녘의 노을로 받아들이지는 말자. 그리고 문학의 매너리즘 속에서 끝없이 침몰하는 패배주의적인 선택은 하지 말자.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