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산사기행] 금정산 범어사

전승선

헌법재판소를 지나 ‘아름다운 가게’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꽃집이 하나 있다. 순박한 한옥집에 꽃집을 차린 곳이다. 그 꽃집엔 칠월의 꽃들이 얌전하게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칠월은 꽃집에서 여름이 된다. 칠월은 종로 북촌에서 꽃이 되었다가 아우성이 된다. 종로에는 여름이 오고 청춘도 오고 지리멸렬한 혁명이 온다. 누군가는 종로를 혁명의 도시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종로를 낭만의 도시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북촌 뒷길에 가지런히 앉아 있는 순박한 한옥의 꽃집을 보며 종로는 여름의 도시라고 불렀다. 혁명도 낭만도 좋지만 나는 그저 여름이 좋을 뿐이다. 여름을 맞이할 수 있는 종로는 내게 어머니의 미소 같은 따뜻함이다. 

 

타자는 지옥이라고 하던 사르트르의 말은 맞는 말이다. 지옥을 이용해 천국을 맛보는 것이 사람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르트르의 투정은 꽤 귀엽긴 해도 어지간한 강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사르트르의 마력에 저절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수많은 타자들의 지옥 구덩이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사이코패스가 되고도 남는 일이다. 하루에도 타자를 만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도 나 자신에게 타자다. 끝없이 사유해야 하고 글을 써야 하며 정신의 배설물을 뱉어내야 하는 건 타자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지옥인 타자와 함께 범어사로 가는 자동차에 올랐다. 지옥과 천국이 함께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옥과 천국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어 있는 존재 아니던가. 칠월의 산들을 뒤로 밀어내며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를 달렸다. 나는 더 빠르게 지구 끝까지 달리고 싶었다. 생각 같아선 지구 밖으로 나가 우주를 떠돌고 싶었다. 삶이라는 유한계도를 언제까지 돌아야 하는지 회의가 들었다. 저처럼 잘 뻗어 있는 고속도로를 질주해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가 아니더라도 나는 칠월을 피해 고속도로를 달려 지구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나는 근래 몇 년간 삶이라는 근원적 물음에 천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몹시 아팠던 딸아이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게 전부였다. 나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나를 위로해 줄 신이 절실했다. 그래서 늘 기도하며 또 기도했다. 나의 기도는 진인사했고 하늘은 대천명했는지 잔혹한 삶의 구렁텅이에서 점차 빠져나올 수 있었다. 딸아이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고 나는 이 세상 누구에게라고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들이마시는 공기에게도 지나가는 개미에게도 나는 존재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바다의 도시 부산은 늘 비릿한 삶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비릿한 냄새는 살아서 사람들의 가슴을 휘젓고 다녔다. 아마 생명의 냄새가 이런 냄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부산을 가로질러 범어사에 도착했다. 울긋불긋한 등이 범어사를 수놓고 있었다. 세상일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유유자적 바람에 흔들리는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나는 짊어지고 온 근심덩어리를 내려놓고 칠월의 바람을 한껏 껴안았다. 범어사 바람이 내게 속삭였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왈칵 눈물이 났다. 범어사 바람은 내게 상냥했고 매달린 등도 내게 미소를 던져주어서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자연도 사람도 종교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모르겠다. 범어사에서는 정말 모르겠다. 눈물이 나면서 마음 안에 있던 돌덩이가 천천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마음에 쌓였던 것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대웅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소를 머금은 부처님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합장한 두 손이 조금 떨렸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올렸다. 

 

금정산에 안겨 있는 범어사에 와서 기도의 맛을 알았다. 깊고 간절한 마음은 닿지 못할 곳이 없는 법 아니던가. 생물학적 기계인 인간의 육신은 한계성에 갇혀 있지만 범우주적 정보 덩어리인 영혼은 닿지 못할 곳이 없기에 나의 기도는 우주에 펴져 부처님께도 닿았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범어사 부처님은 나를 사랑하시어 내게 힘을 주셨을 것이다. 나를 내 안에 유폐시켰던 고난도 별것 아니라는 걸 깨우쳐 주셨다. 이제 두려움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 ‘사랑’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고 내가 내게 속삭였다. 

 

한때 범어사 주지로 계셨던 정여스님을 가까이에서 뵈었던 적이 있는데, 잘 생기인 데다 인자하시고 말 한마디도 따뜻하게 해주시어 유독 마음에 깊이 남았었다. 지금 스님은 다른 곳으로 떠나서 뵐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삼배를 올렸다. 범어사를 내려오는 길에 문득 정여스님의 법문이 떠올랐다.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이미 이대로 완전합니다

 

 

[전승선]

시인

자연과인문 대표

이메일 : poet1961@hanmail.net

 

작성 2025.07.18 10:44 수정 2025.07.1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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