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8년 11월 노량해전을 마지막 전투로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났다. 1604년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시기 전공을 세운 공신 18명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삼고, 임진왜란 초기 선조를 의주로 모시고 피난한 공신 86명을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삼았다.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선무공신보다 선조의 말 고삐를 잡고 의주로 따라간 마부까지 포함된 호성공신이 훨씬 많은 것은 부끄러운 역사의 단면이다.
이후 선무공신으로 선발된 사람들 이외에 추가로 9,060인을 뽑아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삼았다. 이때 공신으로 뽑힌 사람들의 명단을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이라는 제목을 가진 문서로 만들어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발급하였다. 이 자료는 공신임을 증명해주는 일종의 고문서로서, 활자로 인쇄되어 책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선무원종공신녹권은 많은 수의 공신들에게 발급되었기 때문에 꽤 많은 책이 현전한다.
선무원종공신녹권에 수록된 공신은 공과에 따라 크게 1등, 2등, 3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공신 명단을 살펴보면 왕실 종친과 중앙·지방 상하 문무 관리 이외에도 양인(良人), 출신(出身), 보인(保人), 한량(閑良), 향리(鄕吏), 서리(書吏), 영리(營吏), 색리(色吏), 허통(許通), 서얼(庶孼), 면역(免役), 면천(免賤), 승려(僧), 관노(官奴), 사노(私奴), 사노(寺奴) 등 거의 모든 계층의 인명이 망라되었다.
선무원종공신녹권에는 공신들에게 내리는 특권도 수록되어 있다. 1등급의 품계를 가자(加資: 품계를 더함)하고 자손에게 음직(蔭職)을 내리는 등이 그러한 것이다. 선무원종공신녹권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장서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이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무원종공신녹권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양반부터 천민에 이르는 거의 모든 계층의 인물 9,060인의 이름을 수록하였다. 이들 이름 가운데에는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가차(假借)하여 표기한 것도 상당수에 이른다. 물론 그러한 이름들은 사대부를 제외한 중인 이하 계층의 인물들에게서 주로 발견된다. 선무원종공신녹권은 워낙 많은 수의 인명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우리말 이름을 연구하기에 대단히 좋은 자료이다. 현대 통계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훌륭한 통계적 표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 칼럼에서는 선무원종공신녹권에 수록된 우리말 이름들 가운데 한자 '叱(질)'이 사용된 사례를 살펴보려 한다.
선무원종공신녹권에서 '叱'이 사용된 이름은 140여 건이다. 국어국문학 분야에서는 조선 중기에 한자 '叱'이 국어의 음절말 ‘ㅅ’의 차자 표기로 사용되었다는 점에 대해 대체로 동의한다. '叱'의 차자 표기와 관련된 내용을 다룬 연구 자료도 몇 가지 출간되어 있다. 한국학술지인용색인 사이트(kci.go.kr)에서 '叱'을 검색하면 이를 다룬 논문들을 찾을 수 있고, 구글에서 '叱'을 검색해도 그 차자 표기 용법을 설명한 블로그 등이 몇몇 눈에 띈다. 이들 자료는 '叱'의 용례를 대략 설명해주기는 하지만 조금 아쉬운 점도 보인다. 국어국문학 분야에서도 '叱'의 용례가 완벽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선무원종공신녹권』에서 '叱(질)'이 사용된 실제 사례는 아래 표와 같다.

위 표는,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경음)가 날 때 ‘叱'이 음절말 ‘ㅅ’ 즉, 사이시옷으로 사용된 선무원종공신녹권의 몇 가지 이름들을 보여준다. 이들 이름을 살펴보면 ‘叱'의 뒤에 오는 말이 모두 된소리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叱'의 뒷말 첫소리가 된소리(경음)이면서 앞에 오는 말이 특이하여 읽는 것이 조금 어려운 이름도 있다. 다음은 그러한 사례들이다.

한자 ‘仍’이나 ‘芿’은 우리말로 ‘너르다’, ‘넓다’에서 온 ‘너/널’을 차자하던 글자이다. 왜 이 한자가 우리말 ‘너/널/너르’의 차자로 쓰였는지는 알기가 어렵다. 광해군 9년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한자와 한글 표기가 병기된 사례가 많이 눈에 띄는데, 이 책에는 ‘仍叱介(잉질개)’는 ‘늣개’, ‘芿叱同(잉질동)’은 ‘넛동’, ‘芿邑德(잉읍덕)’은 ‘넙덕’과 같이 써놓은 내용이 있다. 이들 사례를 통해 우리말 ‘너/널/너르’를 한자 ‘仍’이나 ‘芿’로 차자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국어사전에서 ‘너벅선’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바닥 너비가 넓은 배라고 설명해 놓고 한자로 ‘芿朴船(잉박선)’이라 표기하고 있는 점도 한자 ‘仍’이나 ‘芿’의 차자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訥叱(눌질)’은 ‘눌’과 ‘ㅅ’이 합쳐진 ‘눐’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표기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訥德(눌덕)’이라는 이름 옆에 한글로 ‘눅덕’이라고 병기해 놓은 것이 있다. ‘訥(눌)’의 종성 발음을 ‘눌-’처럼 길게 끌지 않고 짧게 끊어 발음하여 ‘눋’에 가까운 소리를 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눌-덕’이 아니라 ‘눋덕/눗덕’에 가까운 소리를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 ‘訥德’에 ‘叱’를 추가하면 ‘訥叱德’으로 표기하게 된다. 현대한국어로 표기한다면 ‘눐덕’ 정도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위 표의 이름들 가운데 ‘訥叱(눌질)’로 표기한 이름들도 마찬가지로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이름들은 모두 ‘叱'의 뒷말 첫소리가 된소리(경음)이다. 그런데, 그 뒷말 첫소리가 된소리(경음)가 아닌 격음인 경우도 있다. 발음 상 서로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는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뒷말 첫소리가 된소리(경음)나 격음이 아닐 때 ‘叱'이 사이시옷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 이는 발음의 편리를 위해 ‘叱'이 사이시옷으로 추가된 사례이다.

지금까지 선무원종공신녹권에서 '叱'이 사용된 이름들을 여러 가지 살펴보았다. 이들 사례는 조선 중기 '叱'이 음절말 ‘ㅅ’의 차자 표기(사이시옷)로 사용되었다는 국어국문학자들의 견해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叱'이 사용된 선무원종공신녹권의 이름들 가운데에는 그 구음이 조금 모호한 것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이름들은 당시 '叱'이 사이시옷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잘 입증한다. 개똥이나 소똥이와 같은 하층민들도 선무원종공신녹권에 포함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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