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흥길(1942- )의 '장마'는 길고 지루하게 내리는 비를 뜻하는 ‘장마’를 은유적으로 차용한 소설이다. 장마는 지루하지만 언젠가는 그치고 장마가 그치고 나면 맑은 하늘이 열린다. 작가는 장마의 이런 특성에 착안하여 이데올로기로 인한 갈등과 참상에 대한 치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작품은 장마철과도 같은 음습하고 분위기로 채워져 있으면서 한편으론 장마가 빨리 끝나기를 기대하는 인물들의 바람을 보여 준다. 작품 말미에서 어린 화자가 “길고 지루한 장마였다”고 진술하는 것은 그러한 심경을 표현한 것이다.
긴 장마가 지루하게 계속되던 어느 날, 주인공 동만의 외할머니는 남아 있는 일곱 개의 이빨 중에서 제일 실한 이빨이 무쇠 집게로 뽑히는 꿈을 꾸고 외삼촌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날 징조라는 말을 한다. 아니나 다를까 국군 소위로 전쟁터에 나간 외삼촌이 전사하였다는 연락이 온다. 동만의 외할머니는 피난을 와서 동만의 친 할머니집 사랑채에 머물고 있었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외할머니는 충격을 못 이기고 빨치산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다.
외할머니의 이런 행동은 빨치산이 되어 산속에 숨어 지내는 아들을 둔 친할머니의 심기를 거슬리고 두 노인은 크게 대립하게 된다. 어느 날 맥고자(개화기에 남자들이 쓰던 모자)를 쓴 서울 말씨의 사내가 동만의 집을 찾아와 동만에게 친삼촌의 이름(김순철)을 대면서 동만을 초콜릿으로 유혹해 가며 삼촌이 집에 다녀가느냐고 동만을 꼬드긴다. 동만은 초콜릿에 유혹당해 친삼촌이 온다는 사실을 다 말해준다.
그 날밤 친삼촌이 왔다. 폭발탄에 권총을 두 자루나 차고 말이다. 아버지는 삼촌에게 자수를 권유하고 삼촌은 거절하다 자수를 결심했으나 삼촌을 잡으러 온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도주 한다. 얼마 전 주인공에게 초콜릿을 주었던 맥고자의 사내에 의해 아버지는 오랏줄에 묶여 끌려가고 일주일 만에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빨치산의 습격은 마을 향해 이어지고 토벌당한 빨치산의 시체가 경찰서 마당에 쌓이지만, 친삼촌의 시체는 없다.
그런 가운데 친할머니는 빨치산이 된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소경 점쟁이의 말에 따라 돌아올 아들을 맞을 준비를 서두른다. 친할머니의 분부에 따라 음식을 마련하느라 사람들은 부산하게 움직이고 그러나 점쟁이가 말한 그날이 되었지만, 삼촌은 돌아오지 않고 대신 구렁이 한 마리가 나타나는데 아이 들이 온갖 무기를 들고 모여들고 한 아이가 구렁이를 향해 무언가를 던진다. 구렁이는 누런 비늘 가죽을 꿈틀대고 친할머니는 별안간 실신하고 만다.
모두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외할머니가 나서서 감나무를 칭칭 감고 있는 구렁이를 정성을 다해 달랜다. 구렁이는 마치 외할머니의 마음을 알아본 것처럼 감나무에서 내려와 대밭으로 사라진다. 정신을 차린 뒤 이 일을 알게 된 친할머니는 외할머니에 대한 미움을 거두고 화해한다. 친할머니는 주인공도 용서를 하고 몇 번의 정신을 잃다가 세상을 떠난다. 친할머니는 주인공도 용서하고 그리고 길고 긴 장마가 그친다.
이 작품은 혈연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얽힌 집안 간의 갈등과 화해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전쟁으로 인한 사돈의 반목이 토착적인 무속적 사고에 의해 극복되는 과정을 어린이의 시각으로 묘사한다. 사상이 다른 두 아들의 행방불명과 전사는 두 모성으로 하여금 서로를 적대시하는 관계가 되도록 한다. 삼촌과 외삼촌으로 표상되는 이념적 갈등과 할머니와 외할머니로 대표 되는 혈연의 끈을 놓고 서술자인 소년은 이념의 대치가 일으키는 무서움과 전쟁이 내포한 비인간성을 깨달아간다.
삼촌이 돌아오기로 한 아무 날 아무 시, 동만이네 집에 찾아온 것은 산 사람이 아닌 구렁이였다. ‘저주받은 사람이 죽으면 구렁이가 된다’는 무속 신앙에 걸맞게 두 할머니는 구렁이를 죽은 삼촌의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민간 신앙에서 구렁이는 터주로 여겨지며 환영받는 존재인데, 여기에서 구렁이가 두 할머니 사이의 갈등을 해결해 주는 매개체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구렁이가 돌팔매질을 당하는 것은 전쟁이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민족의 아픔을 나타낸다. 구렁이는 결국 돌아가고, 곧바로 친할머니가 깨어나며 두 할머니는 화해를 한다.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화해는 남북 간 갈등의 정지라고 볼 수 있다.
구렁이는 전통적인 동물 중 하나이다. 구렁이가 상징하는 재래적인 민간 신앙은 남한과 북한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민족의 공통분모이므로,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을 통해 분단과 이념을 극복할 수 있음을 말한다. 작가는 구렁이의 등장과 퇴장을 통해 분단된 민족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면, 전쟁이라는 긴 장마를 끝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피보다 진하다는 이념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분단의 시간을 살고 있다. 결국 민족의 화해와 통일은 무속신앙을 예로든 매개체로 보여 주는 동질성과 공동체라는 것이지 이념이나 남북의 정치적 필요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북한은 주체사상을 통해 절대 충성을 강요하고 국민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한 부속물로 본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사회, 인간성을 존중받는 세상,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지고 사는 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가 독재국가, 전체주의 국가인가. 독재자가 존재하는 한 통일은 어렵다.
[민병식]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시인
현) 한국시산책문인협회 회원
2019 강건문화뉴스 올해의 작가상
2020 코스미안뉴스 인문학칼럼 우수상
2022 전국 김삼의당 공모대전 시 부문 장원
2024 제2회 아주경제 보훈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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