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시의 퐁피두 미술관 분관 유치 논란은 부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특정 지자체의 정책 실패를 넘어 오늘의 한국 사회가 ‘문화’라는 단어를 얼마나 공허하게 소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행정은 언제나 ‘글로벌’을 표방하면서 정작 로컬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시민들의 삶과는 철저히 유리되어 있다. 최근 드러난 퐁피두와의 불공정한 협약과 밀실정치는 문화가 이미 권력과 제도의 언어에 포획된 채 단지 ‘치적’으로만 호출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한국 사회에서 ‘문화생활’은 흔히 백화점 문화센터나 유명 공연 관람과 같은 소비 행위로 축소되어 있다. 문화는 일상의 형식이 아니라 돈을 지불해 누리는 상품으로 여겨지고, ‘수준 있는 문화의식’은 곧 소비력의 문제로 오인된다. 그 결과 공동체의 기억과 언어, 삶의 맥락을 돌아보는 계기는 쉽게 지워진다. 문화정책 역시 시민적 참여와 성찰의 과정보다는 외래 브랜드를 들여와 외관을 꾸미는 데 치중해 왔다.
그러나 이 빈약한 문화의식을 시민 개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문화는 부가적 장식이자 교양적 사치로 치부되었고, 정치권력은 경제 성장과 국위 선양의 도구로만 문화를 호출해 왔다. 시민은 이를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데 익숙해졌고, 문화의 자율성과 비판적 기능은 제도와 시장에 의해 큰 제약을 받곤 했다. 이 때문에 시민은 문화주권자로서의 인식을 충분히 갖출 기회조차 박탈당해 왔다. 퐁피두 유치 논란은 바로 이런 구조적 맥락 속에서 빚어진 사건이다.
문화는 본디 삶의 언어 속에서 피어난다. 지역의 생태와 소소한 삶의 기억, 일상의 연대와 창작이 문화의 토대이다. 세계화를 외래의 유명세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지역적인 것을 세계와 나누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세계화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문화는 남의 브랜드를 성찰 없이 들여와 소비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 지역의 기억과 경험이 반영된 창작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고, 무엇보다 시민 스스로 문화의 주인이 될 때 비로소 문화민주주의가 가능해진다. 문화 주권은 제도가 선물처럼 주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스스로 확보하고 지켜내야 할 권리이자 실천이다.
이제부터라도 기후위기 시대의 문화정책은 난개발과 생태파괴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화려한 외양만 좇는 문화 강국의 청사진은 지역을 지켜내는 목소리와 생명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순간 모래성에 불과하다. 부산시는 천혜의 지질공원인 이기대를 훼손하는 계획을 즉각 멈춰야 한다. 지역의 삶과 기억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세계와 나눌 수 있는 가장 값진 문화이며, 문화민주주의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