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전, 청량산 청량사에서 하는 ‘산사음악회’를 보러 갔었다. 소백산 골짜기를 돌고 돌아 도착한 청량산은 기품 있는 여인의 향기처럼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 깊고 깊은 산골 청량사에 ‘산사음악회’를 한다고 하니 안 가고는 못 배겼다. 모여든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골짜기마다 울려 퍼지는 가수들의 노랫소리는 사람들만 힐링하는 게 아니었다. 그 산에 살고 있는 다람쥐도 힐링하고 고라니도 힐링하고 멧돼지도 힐링했다. 그뿐만 아니라 나무도 힐링하고 풀도 힐링했으며 흐르는 물도 힐링했다. 청량산은 나에게 정말 청량했었다.
마음에 쌓인 짐이 무거워질 때 청량산으로 가면 그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다. 소백산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앉아 있는 청량산은 봉화를 사랑했던 나에게 특별했다. 나는 젊은 시절 소백산 언저리 풍기에서 놀기를 좋아해 작은 토담집 별장을 두고 깊고 깊은 산골을 마구 돌아다녔었다. 봉화도 자주 가고 영양도 자주 가고 그 위로 태백도 자주 가곤 했다. 싸돌아 다니던 시절의 나는 산골의 고즈넉함을 사랑했고 별들이 춤추는 밤하늘을 사모했었다. 오백여 년 전 주세붕도 청량산을 좋아해 ‘청량산에 올라’라는 시를 지었다.
흰 구름 깊은 곳에 사람 사는 집이 있고
흐르는 물소리 속에 옛 책을 읽는다
푸른 산속으로 드는 길, 누가 나를 보랴
솔바람과 밝은 달만이 나와 서로 벗하네
1541년 7월에 주세붕은 풍기군수로 발령받아 내려온다. 풍기는 소백산을 머리에 두고 있는 깊고 깊은 산골이다. 그 산골에 풍기 출신의 성리학자인 안향을 기리는 사당을 설립한다. 그리고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을 짓고 임금인 명종에게 간판 글씨를 써달라고 상소를 올린다.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에게 서원 이름을 짓게 하고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는 뜻의 '소수(紹修)'로 결정해 1550년 2월 11일 '소수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내렸다. 이 소수서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학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세붕은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풍기 지역의 토양과 기후가 산삼의 자생지일 뿐만 아니라 인위적으로 재배해도 되는지 조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산삼 종자를 채취해서 일반 농가에서 재배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삼 재배에 성공한 사례다. 주세붕은 지금의 임실마을에서 시험 재배를 시작해서 경상도 강원도 일대에 보급했고 나중에는 평안도 관찰사들이 풍기로부터 재배법을 배워가기도 했다. 인삼 재배를 통해 지역 주민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립모델을 만들어 공납 체제의 부담을 완화했다. 지금도 인삼축제는 풍기인삼축제가 그 원조이며 가장 화려하게 하고 있다.
주세붕이 청량산을 사랑한 건 아마 자연 속에서 도를 구하고자 하는 성리학의 은거 정신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흰 구름 깊은 곳에 사람 사는 집이 있고 흐르는 물소리 속에 옛 책을 읽는다’라고 읊은 것은 단지 전원생활을 즐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도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물론 도는 도교의 영향이지만, 성리학자들 중에 도를 최고의 가치로 두는 사람도 많았다. 자연은 인간의 감정을 달래는 곳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장소라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푸른 산속으로 드는 길, 누가 나를 보랴
솔바람과 밝은 달만이 나와 서로 벗하네
이 구절을 보면 겉으로는 노장사상의 무위자연과도 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속적인 시선보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스스로 돌아보는 자각의 시선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성리학자인 주세붕이 자연에 은둔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을 교화하고 다스리기 위한 덕을 쌓고자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하기에 사학인 소수서원을 짓고 후학들을 길러내며 거짓 없이 내면의 성찰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소수서원은 유교적 정신을 현실에 뿌리내리려고 한 시도였다. 공교육이 할 수 없는 것들을 사교육으로 보충하려고 했다.
소수서원은 퇴계 이황이 사학의 정신적 기반 위에 주자학적 이론 체계를 얹으며 성리학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특히 퇴계는 ‘이기이원론’을 통해 이의 존엄성과 순수함을 강조했는데 주세붕은 이런 형이상학적 논쟁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현실 정치와 교육의 실천적 틀에서 유학을 구현하고자 큰 노력을 했다. 그런 주세붕이 청량산에 올라 시를 지으며 자신의 정신세계를 넓히고 청량산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선함을 노래했다.
흰 구름 깊은 곳에 사람 사는 집이 있고
흐르는 물소리 속에 옛 책을 읽는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