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라는 말은 종교라는 측면에서도 가장 세련된 태도로 보인다. 이 포스트모던의 안개 속에서, 우리는 '독단'을 두려워하고 '포용'을 미덕으로 삼는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붓다, 공자, 무함마드와 같은 위대한 성인(聖人)의 반열에 두는 것에 익숙하다. 그의 가르침은 훌륭하고, 그의 삶은 감동적이다. 이슬람 역시, '이싸'라는 이름으로 예수를 무함마드 이전에 온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 한 명으로 지극히 존경한다. 꾸란은 그의 동정녀 탄생을 인정하고, 그가 행한 기적들을 긍정하며, 그를 '메시아'라 칭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꾸란 3:45-47)
여기까지,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듯하다.
그러나, 어느 한 지점에서, 인류의 역사를 가르고 두 거대한 신앙이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으로 갈라지는 지점이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 대답이다.
이것은 신학적 논쟁 이전에, 한 인간의 영혼이 어디에 그 뿌리를 내릴 것인지 결정하는 실존적 갈림길이다.
이슬람은 '타우히드(Tawhid)'라는 절대적 유일신 사상 위에 서 있다. 알라는 한 분이며, 그에게는 동반자가 없다. 이 커다란 전제 앞에서, 예수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일 수는 있으나, 절대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하나님'일 수는 없다.
그것은 '쉬르크(Shirk)'라는, 용서받을 수 없는 가장 큰 죄, 즉, 신성모독이 된다. 꾸란은 단호하게 선언한다. "알라가 바로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라고 말하는 자들은 분명 불신자들이다." (꾸란 5:72)
이슬람의 알라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이다. 그는 피조물과 섞일 수 없다. 그는 긍휼을 베풀고 길을 보여주기 위해 '말씀'(꾸란)과 '선지자들'(무함마드, 이사)을 '보낼'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이 멈춰 서는 그곳에서, 가장 경이롭고도 불경스러운 선포를 시작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4)
이것이 기독교의 심장, '성육신(Incarnation)'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낸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이 '메신저'를 보낸 사건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 영원하고 무한한 창조주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옥 안으로, '육신'이라는 연약한 질그릇 속으로, 스스로를 제한하며 '들어온' 사건이다.
이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왜 하나님은 그런 '어리석은' 방법을 택했는가?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길거리에서 굶주리며 떠는 아이를 본다고 상상해 보자. 우리는 그 아이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돈을 보내주거나, 따뜻한 옷을 배달시킬 수 있다. 그것은 선하고 자비로운 일이다. 이슬람의 알라가 보여주는 자비가 그러하다.
그러나, '성육신'은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입고 있던 가장 따뜻한 외투를 벗어 던지고, 문을 박차고 나가, 그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함께 웅크리고 앉아, 그 아이를 내 품에 끌어안고 함께 떠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인간의 문제는 단순히 '길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길을 갈 힘이 없는' 존재였다. 우리의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죄'였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원적으로 단절된, 죽어있는 상태였다.
만약, 우리의 문제가 무지였다면, 위대한 '교사'나 '선지자'를 보내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가 '죄'와 '죽음'이었기에, 하나님은 '스스로' 오셔야만 했다. 단지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죽기 위해서.
이것이 이슬람과 기독교가 갈라서는 두 번째 지점, 바로 '십자가'이다.
이슬람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들은 그를 죽이지도,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 (꾸란 4:157)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가 그토록 무력하고 수치스럽게 죽는다는 것은 알라의 명예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바로 그 '무력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요 능력이라고 외친다.
왜인가? 한 아들이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재판정에 섰다. 아버지는 재판관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지만, 그는 '공의로운' 재판관이기에 "죄가 없다"라고 선언할 수 없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아들의 죄에 합당한 엄청난 벌금형을 선고한다. 공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바로 그때, 아버지가 재판관의 옷을 벗고 단상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아들 옆에 서서,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그 벌금을 '대신' 지불한다.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만족되는 순간이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죄를 심판하셔야 하지만(공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사랑).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이 되어 그 죗값을 '대신' 치르기로 결단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가장 격렬하게 입 맞춘 현장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21)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영혼들이여. 이것은 두 종교 시스템의 우열을 가리는 논쟁이 아니다. 이것은 "나는 누구에게 내 영혼을 맡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당신은 멀리서 당신의 선행을 요구하며 길을 가리키는 '초월적 주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고통 속으로 직접 들어와 함께 울고, 당신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지금도 당신 곁에서 손잡아 주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C.S. 루이스의 말처럼, 예수는 결코 '위대한 도덕 교사'의 자리에 머무를 수 없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이라 주장했다. 그는 미치광이거나, 세기의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그가 말한 그대로 '주님이시며 하나님'이다.
그는 우리에게 좋은 '조언'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썩어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러 오셨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인가? 아니면, 당신의 유일한 구원자인가? 그는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