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강의 인문으로 바라보는 세상] 세상을 읽는 힘



유유히 흐르는 강의 풍광! 강을 보노라면 마음이 여유로워질 뿐 아니라, 부드럽고 한결같지만 또한 끈기 있는 불변의 진리를 보게 된다. ‘하면 떠오르는 작가는 소설가로서 시작하여 말년에 강연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다. 그의 작품톰 소여의 모험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어릴 적 꽤나 인기 있었다. 후에 미국소설을 읽어가면서 이 작품을 다시 읽게 되었으나, 이때 읽는 작품이 어릴 적 읽은 소설과 같을 수는 없었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트웨인의 작품엔 그가 어릴 적 미시시피 강가에서 자라면서 겪은 뱃사공으로서의 경험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경험은 글을 쓰는 작가에겐 글의 원천이 되고, 생업에 종사하는 직장인에겐 한 분야의 풍부한 경험을 통해 높은 경지에 이르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경험은 많을수록 좋고,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읽는 힘은 값진 것이 된다.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은 유한하고, 몸은 하나인 한계에 봉착한다는 것. 유한한 생명체로 살면서 세상경험을 다할 수 없는 한계를 갖는다면 이를 극복할 유용한 방법은 없겠는가?

 

이상적으로는 세상일을 조금씩 다 해보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정된 시간동안 모든 직종의 모든 경험을 다할 수는 없기에, 이를 보완하는 쉽고 좋은 방법은 간접적 경험을 하는 것. 그리고 직접적 경험과 간접 경험을 균형 있게 겸비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나 부단히 공부(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할 것이다.

 

오래 전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몸은 한 곳에 머무는데, 어떻게 한 곳에서 그렇게 지혜로운 판단과 세상을 조망하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겼다. 이는 나로 하여금 학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한 계기가 되었지만, 이후로도 책을 통한 지평의 확장, 그리고 학문의 선배들로부터 배우는 통찰력- ‘세상을 읽는 힘, 오랜 동안 깊은 인상을 주며 큰 감동으로 남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삶의 다양한 측면을 접하기 마련이다. 몸은 한 장소에 있는데 꽤나 많은 정보를 소유하고, 한 기관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좀 더 넓게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손바닥 꿰듯 하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그런 특이함 가운데 사람의 의중을 꿰뚫는 신통력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 사용하는 것이 역정보를 주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존재를 지극히 위해주면서 그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스스로 다 얘기하도록 유도한다거나, 어떤 사람이 당면한 절실한 문제를 슬쩍 역으로 제안함으로써 그의 심증을 읽어내는 식으로,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고 정보를 취득하는 기술을 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고도의 방법이 어떻게 적용되고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자연스레 몇 번 겪으면서 알게 되었다.

 

현대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시대. 이전 시대와 비교해서 더없이 많은 정보가 제공되면서 빠른 판단과 정보처리능력이 요구된다. 과거의 경험을 돌아보니, 그러한 심리적 기술은 아주 잘 활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첩보전에서 흔히 보듯이, 거짓정보를 흘리고 역으로 가짜 미끼를 던짐으로써, 부박(浮薄)한 영혼은 더 부유(浮游)하게 되고, 속전속결에 기반을 둔 소셜미디어 시대의 네티즌(만일 편견을 지니고 사리분별력이 부족한 존재라면)에겐 독과 기름을 부을 수 있는 호재가 될 수도 있겠다.

 

따라서 정보과잉 시대에 혼란하고 혼탁한 사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앞에 선 자들의 역량과 흔들리지 않는 집단지성(集團知性)이 중요할 것이다. 리더의 열린 시야와 깊은 통찰력, 그리고 세상을 일구어가는 많은 사람들의 세상을 읽는 힘. 더불어 개인적, 집단적 미망(迷妄)에 빠지지 않으려는 부단한 노력과 학습. 이런 것으로 한 시대와 사회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가야 할 것이다.

 

리더의 의미는 무겁게 다가온다. 앞에 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기수가 된다는 것, 즉 다른 사람을 이끌기 위해 비전을 제시하고, 앞장 서 어려움을 헤쳐 나가며, 큰 도량과 역량으로 우두머리가 되는 일 아닌가. 스스로 진중(鎭重)하고 투명하며 겸손한 존재로서 하나의 롤 모델이 되고, 남과 다른 크고 높은 경지에 위치하는 일 아닌가.

물론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 수준 또는 기준 이상임을 전제로 한다. 문제는 자신이 세상을 다 아는 것 같은 착각과 독선 그리고 오만에 빠진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광신적 지지로 인해 과대확신을 한다거나, 또는 우상화, 신격화를 통해 자기기만에 빠질 수 있다. 그들이 많은 사람을 대할수록 그 환상의 규모는 커진다. 그럴수록 세상의 오류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일찍이 역사 속에서 인류가 목격한 일이다. 독일의 나치 제3제국은 이런 것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한 시대. 한 사회를 살아가며 극도의 환상 속에서, 비이성적 사고를 하며 집단적 미망(迷妄)에 빠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 시대는 가히 광기의 시대였으며, 이를 통해 인류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 지구적 전화(戰禍)를 겪었다. 한반도 위의 북한에서 통치자가 또는 통치가 하나의 전체를 불행하고 극빈한 삶으로 몰고 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통치로서의 정치가, 하나의 전체를 또는 분열을 통해 대척점을 가진 양극체제를 유지하든, 또는 수많은 쪼개기 시도를 통해 다극점 통치를 하든, 이는 통치의 기술일 것이다. 어느 경우가 됐든, 지도자는 덕망과 철학과 비전을 갖추고, 대중 또는 국민은 미망에 빠지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과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유하는 수많은 존재로 이루어진 사회와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큰 지혜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정치는 큰 물줄기를 다스리는 것, 그것으로 즐거움과 행복, 그리고 평안과 위안을 주면 좋겠다.

 

소박한 바람을 갖는다. “소설가는 언덕 위의 집에서 세상을 조망하는 자라고 말한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말을 떠올리면서, 언제고 내게 맞는 편안한 의자를 만들어봤으면 한다. 그리고 바람이 스쳐가는 언덕 위에서, 그 의자에 앉아 산 아래를 여유롭게 조망하고 싶다. 아직 그런 기술이 없으니, 언제고 목공기술을 배울 기회를 갖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소박하나마 작은 집을 지어 생활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옛 선인들이 손수 집을 짓고, 수리하며, 지붕을 보수하고 ... 손때가 묻은 집에서 살다가 떠나가는 것은 다시금 생각해도 정말 멋진 일이다. 그런 목공 기술도 없고, 삶의 이런저런 조금만 경험들을 글의 집에 제대로 담아내지도 못하니 아쉽기만 하다.

 

삶에 꼭 어떤 결론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완(未完)으로 남겨놓은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을 테니. 신문을 보다가 미완의 완성이란 단어가 빛보다 빠르게 눈에 빨려 들어왔다. 요즘의 이슈로서, 벼린 칼이 검찰의 팔과 다리를 자르는 때에 과연 검찰이 선거개입감찰무마라는 굵직한 두 개의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매우 흥미롭다. 수사를 시작했지만 과연 결론을 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거대권력에 대한 절대권력의 종결점이 과연 어디이고, 그 결과는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함이 커간다. ‘미완의 완성이라는 그 단어를 접하고는 그만 무릎을 치고 말았다. 이 예측이 실제로 들어맞는다면 절묘한 한수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일에는 결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결말을 내지 않는 방식으로 남겨두는 것 또한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테니……. 그 형식은, “최선을 다했으나 더 나아갈 수 없으므로”, 또는 최선을 다했으나 더 나가도록 허용되지 않으므로 ……. 삶에 당장 어떤 결론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앉을 의자를 만들고, 거할 집을 짓고 하는 것은 아직 내게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다. 그렇지만, 나 또한 부단히 애쓰는 탐 크루즈가 되어보려 한다.




[신연강]

인문학 작가 / 문학박사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2.01 10:55 수정 2020.02.0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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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