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류와 순류라 할 때 이를 풀이하자면 상대가 역류를 일으킬 때 휩쓸려 나도 역류를 일으키면 이는 상대가 의도한 바에 지극히 부합하는 꼴이기 때문에 상대가 역류를 일으킬 때는 오히려 순류를 유지하는 것이 상대 입장에서 역류가 된다는 뜻이리라.
간디의 일화(逸話)가 생각난다.
Episode1
간디가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자신에게 절절매며 고개를 절대 숙이지 않는 식민지 출신 젊은 학생을 괘씸히 여겨 그를 밉게만 보던 피터스라는 교수가 있었다. 하루는 간디가 대학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피터스 교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피터스 교수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기를 “이보게, 자네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돼지와 새가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경우란 없다네.” 이에 간디는 말했다. “아, 걱정 마세요. 제가 다른 곳으로 날아갈게요.”
Episode 2
복수심에 교수는 다음번 시험에서 간디에게 엿을 먹이려 했으나, 간디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교수는 분을 삭이며 간디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길 가다가 두 개의 자루를 발견한다. 한 자루에는 돈이 가득 들어 있고, 다른 자루에는 지혜가 가득 들어 있다. 둘 중 하나만 차지할 수 있다면, 자넨 어느 자루를 택하겠는가?” 간디가 대답한다. “그야 당연히 돈 자루죠.” 교수가 대꾸한다. “쯧쯧, 나라면 지혜를 택할 것이네.” 간디가 다시 말한다. “뭐, 각자 자신이 부족한 것을 택하는 것 아니겠어요?”
Episode 3
히스테리 상태에 빠진 교수는 간디의 시험 답안지에 신경질적으로 ‘멍청이(Idiot)’라 적은 후 그 답안지를 돌려준다. 채점지를 받은 간디가 교수에게 말했다. “아, 교수님, 제 시험 답안지에 점수는 안 적혀 있고, 교수님 서명만 있네요!”
이 일화로 내가 1970년대 잠시 런던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할 때 겪은 일이 떠올랐다. 당시 법학대 학장으로 세계법학회 회장 등 감투를 많이 쓰고 있던 모 교수님의 강의 때마다 그리고 그의 학기말 시험문제 답안 논문으로 번번이 그의 법이론에 내가 주제넘고 시건방지게 반론을 제기하자 이 교수님께서는 견디다 못하셨는지 내게 학점을 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강의 시간에 내 발언을 처음부터 중단시키고 입을 닥치라며 얼굴을 붉으락 푸르락 하며 호통을 치시기까지 했다. 이 교수님 덕택에 나는 일찌거니 법학을 월반하고 다니든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그 당시 다른 교수님 한 분이 계셨다. 이 분은 전직 외교관으로 영국 노동당 정부의 각료까지 지내신 분인데 석좌교수로 몇 개 강의를 맡고 계셨다. 나와 학장 교수님과의 충돌을 익히 알고 계셨는지 하루는 대폿집 English Public House(Pub)으로 초대, 나를 위로해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평생을 두고 예의 관찰한 바로는 그분(학장)같이 세계가 좁다고 판치고 밖으로 나대는 사람들은 거의 다 하나같이 본인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특히 가정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이더라. 그러니 괘념치 말고 차라리 그런 사람들을 동정하고 이해해주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부언하시기를 나처럼 이미 철학과 종교를 깊이 공부한 사람의 안목을 극히 협소한 시각의 율사(律士)들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기는 내 고차원적이고 심오하며 명쾌한 논지를 높이 평가해 언제나 내게 후한 점수를 주었노라고 하셨다.
이런 일을 당하면서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 오버랩되는 것이었다. 1955년 내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에 들어가 당시 종교학과 주임교수님의 첫 강의 시간에서였다.
“세계 모든 종교들 가운데 기독교만 참 종교요. 다른 것들은 다 미신(迷信)이고, 기독교 신교의 여러 교파 중에서도 자신이 속한 감리교만 진짜고 나머지는 다 이단이며, 기독교인이 천 명이면 999명은 가짜 신자다.”
이와 같은 말씀에 내가 정중히 이의(異議)를 제기하자 교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외치시는 것이었다. 이 주임교수님 덕분에 내가 교회는 물론 기독교까지 진작 졸업하게 되어 두고두고 이 교수님께 깊이깊이 감사할 뿐이다. 그때부터 “크리스천들만 아니라면 우리 모두 크리스천들이 될 수 있었을 텐데(But for the Christians, we could all be Christians”란 간디의 말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 동의, 동조하게 되었다.
“가슴 깊은 신념에서 말하는 ‘아니오’는 그저 다른 이를 기쁘게 하거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말하는 ‘예’보다 더 낫고 위대하다. (A ‘No’ uttered from the deepest conviction is better than a ‘Yes’ merely uttered to please, or worse, to avoid trouble.)”
이와 같은 간디의 말에 중국의 한나라 한무제 때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이 생각난다. 생각 좀 해보면 ‘바른 소리 하다가 남성을 잃고 고자가 되거나 목숨을 잃고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게 현명한 최선의 길이었을까’ 의문을 품게 된다. 미친 사람이나 미친개 하고 싸우기보다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 아니었을까? 마치 물 흐르듯 뚫을 수 없는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절벽을 만나면 폭포로 떨어지면서 흘러 흘러 바다로 가듯 말이어라.
아, 그래서 예부터 상선(上善)은 약수(若水)라고 물과 같다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도 사족(蛇足) 하나 달아보리라.
삶의 지혜라는 것 중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것도 있다. 우리말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시류(時流)를 따르라고 한다. 영어로는 ‘Go with the Flow’라 하던가. 그렇지만 이런 처세술을 따르다 보면 자기 고유의 인격과 개성 및 정체성은 물론 자신의 존재 이유조차 상실하고 제 삶다운 삶이 실종되는 게 아닐까.
우리 한국인의 경우 그 대표적인 것이 사대주의(事大主義)라 할 수 있으리라. 역사적으로 보면 지정학상 절대적인 필요성에서 우리의 생존수단과 방식이 되어 왔겠지만 이는 동시에 우리의 자존자립을 저해해 오지 않았는가.
몇 년 전 주한 미국대사 피습사건을 계기로 “석고대죄 단식, 쾌유를 비는 무당춤, 위문 발레 퍼포먼스, 보신에 좋다며 개고기를 싸들고 간 위문객 등 ‘과공(過恭)이 비례(非禮)’라는 옛말이 생각나는 낯 뜨거운 사대주의적 행태가 봇물을 이루었었다.
2015년 3월 16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칼럼에서 전직 언론인 이광영 씨는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크고 힘센 나라를 섬기며 주체성 없이 그들에 기대어 존립을 유지하려는 생각이나 주장을 사대주의라 한다. 자신의 존엄을 부정하고 스스로 비하하면서 얕잡아 보며 자기 힘을 믿지 않고 남에게 의존하며 위협이나 압력에 쉽게 굴복한다. 자신의 정당한 권리나 이익을 주장하지 못하며 제물로 바치는 자기부정, 자기비하의 노예근성이라 하겠다. 이런 사람일수록 누가 뭐라고 하면 우르르 따라가는 유행에 휩쓸린다. 요즘의 한국사회가 이런 문화사대주의에 찌들어 있다.”
이를 한 마디로 줄이자면 ‘골빈당’ 노릇 그만하고 ‘골찬당’이 되자는 말이었으리라. 하기는 이게 어디 한국인뿐이랴.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유럽사회에서도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보건 등 각 분야에서 골찬당을 찾아보기 힘들고 민주주의가 아닌 ‘우중주의(愚衆主義)가 판치고 있는 현실이다.
선거란 것도 이익집단의 정치헌금 기부금으로 치러지는 돈놀음이고, 경제란 것도 1%의 있는 자들을 위해 99%의 없는 자들을 제물로 삼는 축제요, 문화란 것도 포르노 등 퇴폐적인 서커스고, 종교란 것도 신(神)과 천국을 팔아먹는 사기 사업이요, 보건이란 것도 인명을 살상하는 총기와 독약 같은 술, 담배 그리고 백해무익한 영양보조제며 마약의 일종인 마리화나까지 기호용으로 합법화시켜 병 주고 약 주는 반인륜적 거대음모라 할 수 있지 않나. 지구생태계를 파괴해 기후변화로 인류의 자멸을 채촉하는 각종 공해산업과 막대한 무기산업은 거론도 할 것 없이 말이어라.
우리가 공중에 날리는 연(鳶)은 바람을 탈 때가 아니고 거스를 때 가장 높이 오르고, 별들도 하늘이 깜깜할수록 더욱 빛나며, 산 물고기는 떠내려가지 않고 물결을 거슬러 헤엄치며, 생명 있는 식물은 땅을 뚫고 올라와 푸른 잎과 아름다운 꽃을 피워 맛있는 열매를 맺지 않는가.
이것이 자연의 순리이고 결코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