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유전학 지도에서 현대인류가 한반도에 5만 년 전쯤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4만년 전부터 북미대륙에서 인류의 생활한 유적이 나타난다. 한반도에서 농사지으며 저수지를 파고 남은 흙으로 작은 흙산을 짓고 그 위에 올라가서 기우제를 지냈다. 한반도에 저수지와 흙산은 한때 참 많았다. 북미대륙은 2만 년 전까지 빙하기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얼음이 녹으며 오대호 주위에 농사짓는 유적과 흙산이 나타난다. 미시시피강 변 따라 3천여 곳에 농사짓고 흙산유적을 남기며 강하구에 이르렀다. 강하구와 유카탄반도 사이에 3,500년 전경에 올멕 문화가 나타난다.
거대한 흙산을 짓고 커다란 석조각물의 얼굴에는 모자를 쓴 북방인이다. 옥돌 얼굴 조각과 홍산문화의 룡과 유사한 단순한 룡 모양의 석조조각이 나타나기에 중미대륙에서 가장 일찍 시작한 문명이다. 중미 유카탄반도 주위에서 아스카, 마야, 페루문명이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와 핏줄이 같고 우리의 언어와 생활 풍습이 같다. 한반도에서 흙무덤과 흙산은 돌산이 되고 만주지역에서 피라미드로 자랐다. 아프리카 이집트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이지만 미대륙에 원주민의 피라미드는 무덤이기도 하고 정상에 재사 드리는 신전이 있는 피라미드다.
중미 아스텍 문화의 테오티우아칸에 해 피라미드는 작은 자연석으로 지어 올린 가장 오래된 건축양식이다. 금속 도고로 큰 바위를 다듬는 시절 이전의 양식이다. 아프리카 쿠푸 왕이 금속 도구로 큰 바위를 다듬어 지은 기자 피라미드와 바닥 크기가 같고 높이는 절반 정도다. 테오티우아칸의 해와 달 피라미드는 우리나라 음과 양의 사상과 상통하며 축제 행군 대로의 끝에 달 피라미드가 자리 잡은 양식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인 듯하다. 남북으로 열린 큰길을 중심 축으로 배치한 격자형 도시계획이 처음 시작되는 모습의 가람(site plan)이다. 바퀴문명을 이미 갖추어온 문화이다.
테오티우아칸 피라미드들 중에 룡머리 조각이 허다하고 꿈틀거리는 룡의 완전한 모습도 보인다. 홍산문화에서 보았던 초기의 룡의 모습보다 더욱 성장한 모습이다. 동아세아의 룡은 고기 비늘 몸이지만 마야의 룡은 새의 깃을 입은 몸이다. 멕시코 캉쿤의 외곽에 치첸잇자 피라미드는 365층계로 룡 머리가 밑에 있고 해 뜨는 아침이면 난간의 룡이 밑으로 기어 내리는 그림자를 만든다. 마야 건축에 층계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부분으로 우리나라에는 불국사 층계나 다보탑 층계처럼 축소된 모습이다. 일본 신사의 층계처럼 넓고 긴 양식과 상통한다. 마야문명은 천문학과 수학이 발달하였다. 마야문자는 한자처럼 문자 하나가 단어 하나의 뜻이다. 상하로 읽기도하고 좌우로 읽기도 한다. 몽골초원의 바위에 수없이 많은 음각화가 그려진 다음 홍산문화에서 처음으로 글자 모양이 나타났다. 현대인류의 문자와 학문은 동아세아에서 음양오행 사상과 함께 시작했다. 마야문자는 그림에서 문자로 발전하는 과정에 그림과 문자 사이의 발전단계를 보여준다.
마야의 종교의식은 상나라의 종교의식과 거의 동일하다. 가면을 쓴 제사장이 피라미드 정상의 신전에서 산 사람을 희생물로 신에게 바친다. 산 사람의 심장을 도려내어 돌접시에 올려놓고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다. 우리 선조는 하늘에 천궁이 있고 바다에 용궁이 있다고 믿었다. 신은 사람의 본능을 가졌다고 생각하기에 여자를 원하고 처녀를 바란다고 믿었다. 심청이를 바다에 바치고 아버지 심봉사가 눈을 뜨는 기적을 이야기한다. 우리나라 옛 풍습에 죄수가 사형선고 받으면 신에게 바치는 희생물로 여겼다. 가면을 쓴 망나니가 칼춤 추며 희생될 사형수와 함께 형장에 걸어가는 우리나라 풍습과 상통한다.
상나라 옥돌 가면과 마야의 옥돌가면은 거의 일치한다. 시신을 옥돌 옷으로 덮고 얼굴과 머리를 옥돌 조각으로 덮은 풍습과 솜씨가 동일하다. 하지만 마야민족은 상나라의 청동문화와는 관계없는 청동기 이전의 민족이었다. 상나라 후기의 청동제기 생산은 오늘날 전 세계 박물관에 전시될 만큼 많았지만 이곳 마야문화에서는 금과 옥돌 유물들만 허다하다.
남미의 페루 문화는 태평양 해안 따라 엔더스 산맥에 위치한 마추피추가 대표적이다. 높은 산 정상에 고립되어 산비탈에 농사지으며 사는 거석문화의 도시였다. 중앙에 축제의 광장이 있고 석조 주거지로 사방을 방어하는 요새 도시 형태이다. 수십 톤 혹은 수백 톤 무게의 거대한 바위들을 잘 다듬어 가장자리가 서로 엇물리도록 세밀하게 가공한 솜씨는 상상할 수 없는 건축기술이다. 이러한 거석문화 유적은 평지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거석문화 이전에 평지에 페루 문화유적은 흙으로 지은 층단식 피라미드들이다. 우리 문화에서 석조 피라미드 짓기 이전에 흙으로 피라미드를 짓던 시대를 보여준다. 요하문명의 석탄불에서 그릇을 굽고 청동기 도구와 무기를 만들 무렵에 자석 철기를 발견하고 나침반을 만들 수 있었다. 이곳 페루의 발굴 유물 중에 나침반이 발견됨은 동아세아와 남미 사이에 해상교통이 활발했을 때의 유물인 듯하다.
미대륙에 원주민 생활은 우리나라의 풍습과 동일하다. 농사짓는 마을에 맷돌, 절구, 키, 도리깨, 디딜방아, 등의 가구가 구비되어 생활 방법이 동일하다. 삼옷을 짜 입고 일본 사람 훈도시 처럼 지저귀 바지를 입었다. 우리나라 모자에 새의 깃을 꽂음은 관복의 형식이었다. 이곳 원주민의 머리 장식에 새의 깃으로 꾸밈이 다양하다. 음식에 우리 고추장을 먹듯이 매운 토바스코를 먹고 개를 기르고 먹는다.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운다. 노래와 춤이 비슷하고 우리의 피리와 퉁수 같은 관악기가 있고 비슷한 현악기가 있다. 우리나라 마을 입구에 사람 모양 나무조각 장승을 세워서 마을을 지키는 풍습이 있다. 북미 원주민 문화에 토템풀은 짐승이나 새의 모습을 조각하여 세웠다.
우리나라에 편두습관은 동이 훈족의 풍습이었다. 남미 페루문화에서도 아기 때부터 이마와 뒷머리를 나무판으로 눌러서 얼굴, 코, 머리가 납작해 보이도록 했다. 이렇게 자라나서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으면 차츰 유전인자에 변형을 초래하여 동아세아 사람들 중에 얼굴, 코, 머리가 납작한 사람을 많이 보게 된 듯하다. 한반도에서 사계절 맞아 농사지으며 수만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만주와 몽골 초원으로, 황하 물길을 따라 티베트로, 바닷길 따라 인도와 서남아세아로, 그리고 미시시피 물길 따라 북미, 중미, 남미로 뻗어 나간 우리문화의 유구한 역사를 본다.
일만 년 전에 동아세아를 찾아온 중화민족과 혼합을 이루며 주나라 때부터 만리장성을 지어 싸우며 동아세아 역사는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문자기록이 있기 이전에 수만 년의 과거는 논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퍼즐 조각을 맞추어 사실을 찾아가는 길밖에 없다.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에서 하나라와 상나라를 기록했고 황하 유역에 고고학 발굴과 유전학 연결과 생활 풍습의 비교로 하나라와 상나라가 우리 선조였음을 이해되었다. 상나라 문화가 미대륙 원주민의 문화와 상통함을 보며 그들은 우리 가족인 사실이 더욱 분명해 보인다.
세계의 고고학계와 역사학계는 이미 미대륙 원주민 문화가 동아세아에서 왔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일본의 자존심에 동아세아 역사는 왜곡되었고 유럽의 자존심에 세계역사가 한없이 왜곡됐다. 중국의 자존심은 동북공정을 외치며 우리 문화를 자국의 문화로 훔쳐가는 의도가 오늘의 현실이다. 한반도에서 북위 44도의 겨울 어름 벽을 무너뜨리며 인류문화와 문명에 첫발을 내드린 후부터 세계 문명과 문화의 뿌리를 이룬 우리 민족의 자존심은 어디서 찾을까? 앞으로 다가오는 새 세대의 학구적 노력에 크게 기대한다.
[최용완]
건축가·시인·수필가
서울공대 건축과 졸업
미네소타 주립대 대학원 졸업
오하이오주 건축회사 대표
미주문협 신인상 수상
자유문학 신인상 수상
에세이포레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