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이태상

사랑은 그저 사뭇 단순하고 영적인 것으로 사회적인 계층이나 나이 또는 심지어 성적(性的)인 정체성과 아무 상관없다. (Love is so simple and spiritual. It is not related to social status, age, or even sexual identity.)”

 

미국에서 교육 받은 중국의 대표적인 성()과학자로 몇 년 전 중국 사회 과학 아카데미에서 은퇴한 리인헤 (당시 63) 교수의 말이다.

 

이것이 어디 성적인 정체성뿐이랴. 인종과 국적 또는 타율적으로 강요되는 기타의 강박관념에도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미국을 비롯해 유럽 국가들은 물론 한국도 이젠 다인종 사회가 된 하나의 자구촌에서 시대착오적인 인종차별이나 애국애족심은 우리 모두 어서 졸업할 때가 왔어라.

 

벌써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힐링(healing)’이란 단어가 유행어가 되었는데 이 힐링이란 몸과 마음과 영혼의 치유와 회복을 의미하고, 1991년 초반에 나온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1958-2009)의 노래 세상을 바로 잡자(Heal the World)’는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만든 곡으로 너와 나, 인류를 위해 세상을 치유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라는 가사다. 그 후로 그는 ‘Heal the World Foundation’을 설립해 죽기 전까지 전 세계의 불우한 어린이들을 도왔다.

 

한국에서 2011718일부터 201621일까지 SBS의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가 인기리에 방영되었고, 흥미롭게도 덕목이랄까 매력 포인트로 카리스마 (charisma)’란 말이 아직도 유행하고 있지만, 고대 그리스어로 카리스는 축복이란 뜻이고, 치유능력이란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을 카리스마타라고 불렀다 한다.

 

우리 좀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이런 치유능력이란 의사 또는 어떤 성직자나 도사에게만 부여된 게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자연치유능력이 아니던가. 다만 잘못되고 혼동된 주체성을 바로 잡기만 하면 누구나 다 깨닫게 되는 축복임에 틀림 없어라.

 

우리가 현재 어느 나라 어느 곳에 살고 있든 간에, 내가 어떤 인종과 성별과 연령의 어떤 직업인이든 간에 나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돌아가는 누구이며 무엇인가에 자문자답할 수밖에 없으리라.

 

우리 한국인의 예를 들어보자. 조국인 한반도에 살면서도 남과 북으로 갈려 내 고향은 북한인가 남한인가, 재일동포들은 일본인인가 한국인인가, 미주동포들은 미국인인가 한국인인가, 연변동포들은 중국인인가 한국인인가, 사할린동포들은 러시아인인가 한국인인가, 혼동을 극복하고, ‘우물 안 개구리도토리 기재기는 그만하고, 큰 그림에 비춰 본 우리 모두의 진정한 정체성을 깨닫는 일이어라.

 

지금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있든 아니면 벗고 있든, 어떤 감투나 모자를 쓰고 있든, 어떤 머리 색깔과 스타일을 하고 있든, 이 모든 외형의 껍데기가 나는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누구라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상상조차 할 수 없이 광대무변의 무한한 우주 속 티끌보다 못한 아주 작은 별 지구에 잠시 살 뿐이다. 이 지구별에 잠시 머무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비록 우리 몸은 환영(幻影)에 불과하지만 우리 마음과 혼은 우주처럼 무궁무진함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우리 개개인 아니 우리 모두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정체성을 찾게 되리라. 우리 모두 우주나그네 코스미안임을.

 

서력 16세기 초 인도의 텔레구(Telugu) 지방 시인 알라사니 페다나(Allasani Peddana 1550-1575)는 북인도 갠지스강 평원(The Indo-Gangetic Plain)에 있는 집에 붙박여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브라민(Brahmin) 귀족 출신 친구 프라바라 (Pravara)에게 한 요가수행자(yogi)를 소개한다. 그는 이 요가 스승에게 묻는다.

 

어떤 나라들을 가보셨습니까? 어떤 산들을 올라가 보셨습니까? 어떤 강물에서 멱감아보셨습니까? 어떤 섬들을 찾아보셨습니까? 어떤 신선(神仙)의 숲에 들어가 보셨습니까? 어떤 대양 바닷가에 가보셨습니까? 세세히 새롭고 경이로운 얘기를 하나도 빼지 말고 다 좀 해주십시오.

 

왜 내가 이곳저곳 예기를 한단 말인가? 나는 하늘 아래 모든 걸 다 보았다네.” 이렇게 대답하고 나선 그가 가보았다는 인도 서북부에 있는 힌굴라(Hingula) 여신 사원으로부터 동서남북 수많은 곳을 일일이 입에 올렸다. 그의 말은 실제로 다 가보았거나 가보기를 원했던 사람 얘기로 들렸다. 그러면서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동시에 그 세상을 함께 동행하는 것이었다.

 

 

"난 미국을 내 이야깃거리 주제로 삼았고, 미국과의 다툼이 내 작품 속 시빗거리가 되었다.

(I had taken America as my subject, and my quarrels with America went into it.)"

 

미국 작가 로버트 스톤(Robert Stone 1937-2015)의 말이다. 아마도 이 말에서 '미국' 대신 '세상'이란 단어로 바꾼다면 나 자신을 포함해 모든 글 쓰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어쩜 이를 통속적인 한마디로 하자면 '그건 사실 아니 진실이 아닐 건데'가 되리라.

 

"현재 존재하는 것 아무것도 해답을 주지 못하고, 옛날의 해결책은 해법이 되지 못한다. (Nothing that exists at present offers a solution, and old answers are irrelevant."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노아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 - )2011년 출간된 그의 저서 '사피엔스: 간략한 인류사(Sapiens: A Brief History of Humankind)'에서 주장하는 말이다. 그리스어로 같다는 뜻의 '호모(homo)'와 현명하다는 뜻의 '사피엔스(Sapiens)'의 합성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인류를 가리키는 단어에서(추측건대 결코 '현명하다'고 할 수 없는 인류가 '같다'고 할 수 없어 저자가 의도적으로 '호모'를 생략해 빼고) 붙인 책 제목이다.

 

21세기에 들어와 인터넷 과학기술 발달로 제2'산업혁명''기술혁명'이 수많은 사람을 잉여인간화해 도태시키고 있는 현실을 진단하고 그 가까운 미래를 예측하는 저서이다.

 

비근한 예로 스마트폰이나 아이폰 등 손바닥 안에 드는 작은 전화기 한 대로 수많은 직업인이 수행하던 작업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각종 로봇이 등장해 사람보다 더 신속 정확하게 훨씬 더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수많은 직업이 없어지고 있는가 하면 빈부의 격차가 더욱 심해져 극소수의 '있는 자' 갑의 횡포로 절대다수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의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기생충'이 세계적으로 뜨거운 반응을 일으킨 게 당연한 일이리라. 따라서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이 이슬람국가의 IS 같은 폭력집단에 가담하게 되고, 20세기에 발호했던 나치즘과 파시즘 및 공산주의 러시아혁명을 상기시키지 않는가.

 

,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그 해법을 찾아야 할까. 지난 2천여 년 유대교, 기독교, 가톨릭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각종 기성 종교를 앞세워 자행해 온 계급 및 노예제도, 식민지 정책, 십자군 전쟁 등 모든 반인륜적이고 반자연적인 서구의 기계문명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하고 보다 밝은 인류의 진로를 모색할 수 있을까.

 

종전과 같은 '산업혁명'이나 '기계혁명'으론 가망 없고, 보다 차원 높은 '정신혁명'이 절대적으로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도 기존의 종교와 같은 독선독단적인 도그마나 교리가 아닌 '인내천'이나 '홍익인간' 아니 '홍익만물' 같은 열린 사상과 신성(神性)과 불성(佛性)을 지닌 우리 자신 본연(本然)의 본성(本性)을 발견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4.13 11:33 수정 2020.04.13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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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