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感謝)는 사유(思惟)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경지(境地)이고, 감사하는 마음은 경이(驚異)로움으로 배가(倍加)된 행복(幸福) 이다. (Thanks are the highest form of thought, and gratitude is happiness doubled by wonder.)”
영국 언론인이자 작가 G. K. 체스터튼(Gilbert Keith Chesterton 1874-1936)의 말이다. ‘감사는 사유의 지고지순한 경지’란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은 경이로움으로 배가 된 행복’이란 말은 내 성에 너무 차지 않는다. 나 같으면 행복감이 경이로움으로 ‘배(倍)’가 아니라 ‘억만배(億萬倍)’ 된다 해도 부족하다고 말하리라.
2020년 4월 15일자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삶과 문화’ 칼럼 ‘베토벤, 지구의 회복을 북돋는 인간의 음악’ 필자 조은아 피아니스트 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이렇게 우리를 일깨워준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병상에 누워 있던 지구에게 다람쥐가 묻습니다. 지구는 가까스로 기운을 차려 몸을 일으킵니다. 바다 거북이와 북극곰도 침상 곁에 모여 지구를 극진히 간호합니다. 병실 밖 하늘은 먼 산이 창문 안으로 성큼 들어올 만큼 맑디맑습니다. 위태로웠던 지구의 건강을 이만큼이나마 회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지구가 맞고 있던 링거, 코로나 덕택이었습니다. 삶의 근거지 빙하의 파괴에 몸부림치던 북극곰, 해변을 빡빡이 점령한 휴양객들로 산란의 공간마저 빼앗겼던 바다 거북이가 누구보다 지구의 회복을 기뻐합니다.
코로나 위기에 다시 숨쉬기 시작한 자연, 며칠 전 접했던 한 신문의 만평은 이렇듯 뼈아픈 역설을 깨우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어서 죄책감을 느꼈고 인간으로 소외되어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돌연 이 장면에 음악을 입히고 싶어집니다. 지구의 회복을 기원하는 음악, 자연의 목소리를 번역해 증폭시켜 주는 음악 말입니다. 다행히 한 얼굴이 금세 떠오릅니다. 자연의 영혼에 혼신을 다해 귀 기울였던 음악가, 올해로 탄생 250주년을 맞이했지만 어쩌면 스스로 성대한 생일잔치를 마다한 채 지구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을 음악가, 그의 이름은 베토벤입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의 애송시로도 잘 알려진 조선 후기 문인 임연(臨淵)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의 문집 ‘야설(野雪)’에 수록된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이와 대비시켜 미국 굴지의 사업체 아마존(Amazon)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 1964 - )의 ‘아마존 식(The Amazon Way)’으로 불리는 생활신조와 지침을 우리 다 함께 생각해 보리라.
조만간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더라도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경제의 구조적 변화는 물론 실물보다 사이버 공간의 중요성을 사람들은 절감했다. 소매상과 쇼핑몰이 문을 닫은 상태에서도 아마존은 크게 번창했다.
이 ‘아마존 식’이란 다른 사람이 이미 걸은 길이 아닌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독창적으로 개척한다는 것이다. ‘난 별난 사람(I’m peculiar)’이라는 자긍심이요 자부심이다. 이는 ‘실제로 실용적인 필요를 충당할 때 느낄 수 있는 미래지향적이고 마술적인 성취감(We’re solving a really practical need in this way that feels really futuristic and magical)’이란 뜻이다.
‘하늘의 별을 따겠다고 할 때 이는 참으로 도전적인 모험이 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When you’re shooting for the moon, the nature of the work is really challenging. For some people it doesn’t work.)’는 말이다.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아마존 직원들에게 범용(凡庸)하고 열등(劣等)한 용렬(庸劣)함을 기피하라는 근무작업 수칙(守則)을 세웠다. (Founder Jeff Bezos established guidelines as instructions for employees, and to stave off mediocrity.)
따라서 많은 직원들이 마음을 크게 먹고 아직 그들이 가능성의 표면조차 건드리지 못한 상태임을 절실히 느끼는 일이다. 이를 한 마디로 줄인다면 우리말로는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고 영어로는 ‘모험 없이 아무것도 얻을 수없다 (Nothing ventured, nothing gained)’가 되리라. 참으로 인생은 모험이고, 사랑은 모험 중의 모험이어라.
그러니 ‘코로나’를 포함해서 세상에 우리 모두가 깊이깊이 감사하지 않을 일이 어디 있을까. 우리 개개인마다 각자의 시원(始原)부터 생각해 보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생일, 그것도 엄마 혼자 산고를 치른 날을 축하하지만, 그 이전 엄마 아빠가 함께 사랑을 나누며 즐거워하다가, 다시 말해, 생명의 음악(音樂/淫樂)을 통해, 엄마 몸속에 잉태된 ‘임신일(Conception Day)’을 축하할 일 아닌가.
우리 모두 각자가 하나같이 하늘의 별처럼 많은 정자 중에서 선택받은 황태자 정자가 난자와 결합해서 탄생한 새 별들이 아닌가. 그 이후로 우리가 숨 쉬고 살아온 순간순간이 더할 수 없이 기적 같은 축복의 연속이 아니었나. 또 그러니 우리 각자가 언제나 감사할 일이, 경이로움을 느낄 일이 어디 한둘인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하늘의 별보다 많지 않은가. 우리가 삶을 살면서 흔히 느끼는 실망 또는 절망이란 것이 우리 기대에 못 미쳤거나 미칠 가능성이 없어 보일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고 이런 실망감 또는 절망감으로 인해 불행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실망감이나 절망감을 미리 예방하는 것이야말로 묘책 중의 묘책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기대치(期待値)를 낮춤으로써, 더 바람직하기는 더이상 내려갈 곳 없는 맨밑바닥 부터 출발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항상 기대보다 웃도는 결과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언제나 어떻든 매사가 놀랍고 감사할 일뿐 아니랴.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라지만 우리 모두 삶이라는 산을 한 발짝 한 발짝씩 오르는 흥분과 자극, 스릴과 쾌감, 그리고 가슴 뿌듯한 성취감까지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햇빛이 나면 나는 대로, 별빛이 반짝이면 반짝이는 대로, 산천초목과 더불어 춤추고 기뻐할 일 아닌가. 천둥과 번개마저도 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황홀지경이 아니겠는가. 무엇이고 없을 무(無)보다는 있다는 존재(存在) 자체가 기적 이상이 아닌가 말이어라.
어디 그뿐이랴.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주장하는 공사상(空思想)은 불교를 일관하는 교의 또는 사상을 말하는데, ‘공(空)’은 산스크리트어 ‘순야타 (Sunyata)’ 비어있음을 번역한 것으로,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일체의 존재를 상의상대 (相依相待) 서로 의존하는 연기(緣起)의 입장에서 파악, 일체의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배격한 무애자재(無礙自在), 곧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即是色)이고,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며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중생의 미견(迷見)으로 보면 미망(迷忘)의 주체인 번뇌와 각오(覺悟)의 주체인 보데가 딴판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두 가지가 하나이고 차별이 없으며 열반에도 열반의 모양이 없어서 온전히 하나라고 하지 않는가.
몇 년 전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환경과 삶’ 칼럼 ‘내 마음의 명왕성’이란 글에서 수필가 환경 엔지니어 김희봉 씨는 이렇게 우주의 섭리를 이해한다.
“태양계의 끝, 햇빛은 스러지고 별들만 숨 쉬는 곳, 불 꺼진 변방의 간이역처럼 홀로 떠 있는 우주의 섬, 그 외로운 명왕성에서 기척이 왔다. 지난주 미국의 우주 탐사선 뉴호라이즌스호가 근 10년을 날아 근접한 명왕성에서 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2006 년 태양을 등지고 날아간 무인선이 보내온 첫 영상엔 놀랍게도 커다란 하트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달 표면의 계수나무처럼 명왕성엔 하트가 선명했다. 명왕성이 보낸 연서(戀書)였다.
알다시피 우주의 가장 큰 법칙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다. 우주의 별들이 수없이 명멸하고 원자의 수가 증감해도 총량 에너지양은 변하지 않는다. 또 있다. 빛의 속도나 만유인력 상수(常數), 전자의 전하 등도 변하지 않는다. 우주의 법칙은 작은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변하나 큰 눈으로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조물주의 섭리도 그럴 것이다. 그 섭리를 이해하고 탐험선의 운행에 운용하는 것이 과학이요. 그 섭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옳거니, 그렇고 말고, 여부가 있으랴! 우주처럼 시작도 끝도 한도 모를 무궁무진한 사랑으로 태어나 사랑으로 숨 쉬다 사랑으로 돌아갈 삶에서 이 사랑이란 경이로움의 극치에 우리는 무궁무진 감사할 일뿐이어라. 이 사랑의 불꽃을 고두현 시인은 ‘만리포 가다가’ 발견한다.
만리포 사랑
당신 너무 보고 싶어
만리포 가다가
서해대교 위
홍시 속살 같은
저 노을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바알갛게 젖 물리고
옷 벗는 것
보았습니다.
장석주 시인은 이 사랑의 불꽃 때문에 ‘세상은 살 만한 것이다’라고 한다.
“사는 게 진절머리난다면 천리포 만리포 가다가 서해대교 위에 멈춰 서서 홍시 속살 같은 타는 노을을 보라! 저 노을이 만물에게 바알갛게 젖 물리는 모습을 보라. 자연은 젖을 물려 만물을 길러낸다. 해는 아침에 뜨고 저녁엔 서쪽으로 지는데, 이 해의 은총 속에서 식물들은 꽃을 피우고 사람은 사랑을 하며 아기들을 낳고 산다. 괴테는 태양 속에 존재하는 신(神)의 빛과 생산 능력을 숭배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이들이 있고, 도라지밭에서는 도라지꽃이 피고 감자밭에서는 감자알들이 커간다. 세상은 살만한 것이다.”
2015년 미국에서 출간된 책 두 권이 오늘의 우리 시대상을 잘 관찰하고 진단한다. 그 하나는 ‘과소평가되고 있는 인간: 놀라운 기계들이 결코 알지 못할 것을 아는 우등생 인간들(Humans Are Underrated: What High Achievers Know That Brilliant Machines Never Will)’로 저자 조프리 콜빈(Geoffrey Colvin, 1953 - )은 현재 컴퓨터가 인간이 해오던 일들을 인간보다 더 신속 정확하게 훨씬 더 능률적으로 수행하게 되어 인간을 도태시키고 있지만 절망할 일이 아니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성 아닌 감성으로 서로를 돌보고 보살피는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란다. 기술적인 면은 기계에 맡기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치중하면 된다는 얘기다.
또 하나는 ‘자신과 영혼: 이상옹호론(Self and Soul: A Defense of Ideals)’인데 저자 마크 애드믄슨(Mark Edmundson, 1952)은 이렇게 관찰하고 진단한다.
“서구 문화는 점진적으로 더욱 실용적이고 물질적이며 회의적으로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석가모니나 예수 같은) 성인 성자들은 의미 있는 자비심 충만한 삶을 추구한다. 재화를 획득하고 부(富)를 축적하노라면 인간의 참된 도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성스러운 삶이란 욕망 이상의 인류를 위한 희망이다. 이것이 일찍부터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만족감이다. (Culture in the West has become progressively more practical, materially oriented, and skeptical,…(like Buddha or Jesus) The saint seeks a life full of meaningful compassion. The acquisition of goods, the piling up of wealth, only serves to draw force from his proper pursuit. The saint lives or tries to live beyond desire. Even early on, as they enter the first phase of their lives as thinkers, they’ll have one of the greatest satisfactions a human being can have.)”
이 두 권의 책 내용을 내가 한 마디로 줄여보자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건 ‘사랑’이란 말이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자연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게 곧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나 자신을 사랑할 때 내가 진정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영어의 사자성어(四字成語) ‘love’는 우리말의 이자성어(二字成語) ‘사람’과 ‘사랑’이라는 동음동의어(同音同意語)가 돼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