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 증후군(Stendhal Syndrome)’이란 뛰어난 예술작품을 감상한 후 압도적인 감동으로 심장이 빨리 뛰고, 의식 혼란과 격렬한 흥분이나 어지럼증을 동반한 환각 상태를 경험하는 현상을 말한다.
명작 소설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The Red and the Black, 1830)’의 프랑스 작가 스탕달(Stendhal, pen name of Marie-Henri Beyle 1783-1842)이 이탈리아 피렌체를 방문해 르네상스 미술품들을 감상하다가 무릎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경험한 다음 이를 자기 작품에 그대로 서술해 묘사했고, 그 이후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한 여행객들의 사례가 보고되면서 ‘스탕달 증후군’이란 용어가 생겼다고 한다.
이 같은 현상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것이 어디 ‘미술품’에 한해서일까. 자연만물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볼 때 ‘예술품’에 비할 수 없이 언제나 한없이 경이롭고 신비로운 우주에 몰입(沒入)하게 되지 않던가. 때론 숨 막히고 심장이 멈추는 듯 정신이 혼미해지는 무아지경의 황홀감을 느끼게 되지 않던가.
오늘 친구가 이메일로 전달해준 누드 서예를 감상하면서 그 어떤 미술품의 명화를 볼 때보다 더 진한 감동을 받게 된다. 어려서부터 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에 별 흥미를 못 느꼈고, 인공 건축물이나 도시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시골이 더 좋았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기계문명을 등지고 원시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문명의 이기가 편리하지만 마치 유체이탈(幽體離脫)이라도 하듯 우리가 우리의 근원과 분리돼 우리의 근본을 망각해버리는 것 같아서이다.
우리 외면의 세상도 놀랍지만 우리 내면의 세계는 그 더욱 놀랍지 않은가. 불교의 득도(得道)한 스님들이 천리 밖을 내다볼 수 있다는 ‘천리안(千里眼)’이 요즘 과학자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고 한다.
‘하늘의 별들이 반짝이고 우리 가슴 뛰는 기적’을 독일의 낭만주의 성향 작가이자 철학자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이렇게 표현했는가 보다. “사람은 자기 가슴 속에 지닌 것만 보게 된다. (A man sees in the world what he carries in his heart.)라고. 이는 우리 밖의 우주도 신비하고 우리 안의 우주도 신비함을 말한 것이었으리라.
몇 년 전 서울대학교 미주지역 동창회보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 ‘My Story and Your History’라는 페이지의 일곱 가지 질문에 답한 것 중에 2번째, 4번째 그리고 5번째 질문에 관한 것만 옮겨본다.
2. 동문님의 인생에 가장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나 삶의 철학, 좌우명?
답: 열 살 때 지은 자작 동시 ‘바다’와 사춘기 떄 지은 자서시(自敍詩) ‘코스모스’가 있는데 ‘바다’는 나의 주기도문(呪祈禱文)이 되었고, ‘코스모스’는 내 인생순례기(人生巡禮記)가 되었다.
4. My Favorite Things: 책, 음악, 영화, 음식, 사람, 장소 등등
답: 첫인상이 코스모스 같아 나의 ‘코스모스’라고 부르고 4.19를 전후해서 혈서로 사랑을 고백했으나 실연당해 유서를 우편으로 부치고 동해바다에 투신까지 했었던, 나의 첫사랑이 ‘행여나 님이실까’ 읽어주길 간절히 바라는 일념에서 쓰기 시작한 ‘코스모스 시리즈’를 책으로 내는 것이 나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었다.
5. 동문님이 자랑하고 싶은 특별 건강관리 비법은?
답: 만인과 만물을 ‘코스모스’의 분신으로 보고 죽도록 사랑하는 것.
또 몇 년 전 어느 한 주말 인근에 있는 과수원에 사과 따러 갔다 와서 집 주위 잔디밭에 떨어져 있는 낙엽들을 긁어모아 수북이 쌓아 놓고 그 위로 일곱 살짜리 내 (피 한 방울 안 섞인) 외손자 일라이자 (Elijah)가 벌렁 나자빠지더니 청명한 가을 하늘을 쳐다보며 지그시 눈을 감고 탄성을 지른다.
“이게 삶이야! (This is life!)”
내가 내 귀를 의심하면서 “너 금방 뭐라고 말했니?”라고 묻자, 제 엄마는 한미(韓美) 혼혈아이고 아빠는 유태인인 이 아이가 “이게 삶이야!”를 반복하고 나서 느긋이 웃으며 “농담이야! (It’s a joke!)”라고 한다.
최근 친구가 이메일로 전달해준 글이 떠오른다.
촛불 하나의 교훈
미국의 존 머레이는 한 푼의 돈도 헛되게 쓰지 않는 검소한 생활로 부자가 된 사람이다. 어느 날 머레이가 밤늦도록 독서를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찾아왔다. 그러자 그는 켜놓은 촛불 2개 중 하나를 끄고 정중히 할머니를 맞았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선생님께 기부금을 부탁하려고 왔어요. 거리에 세워진 학교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조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는 겸연쩍게 말했다. 그러자 머레이는 돕겠다는 대답과 함께 5만 달러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선뜻 거액을 기부하겠다는 말에 할머니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에 촛불 하나를 끄는 것을 보고 모금이 안 될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거액을 기부해주시겠다니 기쁘고 놀라울 뿐입니다.”
“독서를 할 땐 촛불 2개가 필요하지만 대화할 때는 촛불 하나면 충분하지요. 이처럼 절약해왔기 때문에 돈을 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질은 가치 있게 사용할 때 빛난다. 우리말에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나도 어려서부터 혼자 한 걸음 한 걸음씩 산꼭대기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어떻게 내가 이 높은 산을 올라왔는지 감탄을 하곤 했었다. 세상살이가 다 이와 같은 것 같다. 돈도 한 푼 두 푼 아끼면 꼭 써야 할 때 큰돈으로 쓸 수 있어서이다. 낙엽 하나하나 갈퀴로 긁어모아 만든 풍성한 낙엽침대에 벌렁 누워 흐뭇한 만족의 탄성을 지르는 내 외손자처럼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생각이 난다. 다니던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이시던 나보다 네 살 위의 여선생님이 한동안 안 보이시더니 서울 서대문 밖 홍제동에 있는 보육원 고아원 보모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 고학하며 모은 돈을 몽땅 털어 선생님께 드릴 시집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원아들에게 줄 과자 등을 사서 전차나 버스도 타지 않고 서너 시간씩 걸어서 찾아가곤 했었다.
그야말로 ‘개미 금탑(金塔) 모으듯’ 나는 단 한 푼도 낭비하지 않고 큰돈은 아니지만 작게나마 항상 내가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었다. 딸들이 영국 만체스터에 있는 음악기숙학교에 다닐 때 애들 보러 가서는 주머니에 있는 돈 타 털어주고 밤늦게 서너 시간 차를 몰고 돌아오면서 휴게소에서 차 한 잔 마실 돈도 없었다.
매주 영국 각지로 출장을 다니면서 식대로 나오는 돈으로 식당에서 밥을 사 먹지 않고 하루 세끼 집에서 싸갖고 간 샌드위치로 때웠다. 미국에 와서는 가발 가게를 하나 하면서 아파트 방 한 칸 얻지 않고 가게 뒤 헛간에다 야전 침대 하나 놓고 지내기도 했다.
6.25동란 때는 미군부대 ‘하우스보이(houseboy)’로 일하면서 미군 장사병들이 시도 때도 없이 주는 추잉검, 초콜렛, 과자, 도로프스(drops) 사탕 등 오만 가지 맛있는 것들을 하나도 입에 대지 않고 다 모았다가 어머니께 갖다 드려 팔아 쓰시게 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언제나 백만장자 부럽지 않을 정도로 부족함을 모르고 꿈도 못 꾸던 수많은 일들을 하고 싶은 대로 해오면서 나도 내 외손자 일라이자의 탄성처럼 ‘이게 삶이야!’를 날이면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내지르게 된다.
가수 인선이가 2015년 10월 16일 발표한 첫 솔로곡 ‘사랑애(哀)’는 연인과의 헤어짐을 예감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여자의 애절한 마음을 담아 부르는 노래라고 했다. 이게 어디 연인과의 헤어짐 또는 여자의 마음뿐이랴. 부모형제, 부부와 자식, 손자 손녀, 친구와 이웃, 모든 사람과의 헤어짐을 예감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질 운명이라는 회자정리(會者定離)를 처음부터 잘 알고 있어야 하는 일 아니랴.
그런데도 우리는 이 엄연한 사실을 종종 잊고 사는 것 같다. 누가 되었든 지금 내가 마주 보고 있는 사람과 조만간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생각할 때 슬프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어린 손자와 손녀를 보면서 이 아이들이 다 크는 걸 못 보고 이 세상을 떠날 생각을 하면 너무도 슬퍼진다.
아, 그래서 시인 윤동주(1917-1945)도 그의 ‘서시(序詩)’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다짐했으리라. 이 실존적인 슬픔을 극복하고 초월하기 위해 신화와 전설을 포함한 문학과 예술이 생겼으리라.
문학에서는 흔히 ‘이야기(story)’와 ‘이야기의 줄거리(plot)’를 구별한다. 전자가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일들이라면 후자는 이런 모험들이 결말지어지는 관점에서 바라본 사건들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한 소년이 삭발하고 중이 되겠다고 절에 들어간다. 아무도 그 까닭을 모른다. 그가 한 소녀로부터 거절당한 걸 알게 될 때까지.’ 이것이 미스터리가 있는 ‘플롯’이다. 우리가 시간 속에 살듯이 픽션 속의 인물들도 그렇지만 먈이다.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시간이나 픽션 속 시간이나 둘 다 시계의 초침이 때깍 때깍하는 대로가 아니고, 길게도 짧게도 주관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픽션에선 이야기와 이야기 속 인물에 따라 시간이 경과하고 존재할 뿐, 의미가 없거나 이야기에 보탬이 안 되는 시간은 없는 셈이다. 현실과 픽션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현실세계에선 ‘원인’이 ‘결과’를 초래하지만 픽션에선 그 반대란 것이다.
독일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1777-1811)는 ‘인형극장에 관하여(About the Marionette Theater)’란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인형들은 요정들처럼 지상(地上)을 오로지 출발점으로 사용할 뿐이다. 잠시 쉬었다가 그들의 팔다리로 새롭게 비상하기 위해 지상으로 돌아올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구가 필요하다. 지상에서 춤을 추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지만 이 휴식 자체는 춤이 아니다. 휴식하는 이 순간들을 휴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가장하는 것 이상 없다.”
“These marionettes, like fairies, use the earth only as a point of departure; they return to it only to renew the flight of their limbs with a momentary pause. We, on the other hand, need the earth: for rest, for repose from the effort of the dance; but this rest of ours is, in itself, obviously not dance; and we can do no better than disguise our moments of rest as much as possible.”
인형극에 나오는 인형이나 만화 속의 인물처럼 픽션 속의 인물도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 인과관계를 뒤집는다. 픽션에서는 현실과 달리 시간도 사랑도 오직 그 의미만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이 견딜 수 없는 잠시의 슬픔이지만 동시에 영원한 기쁨이리. 그러니 우리 모두 그리스인 조르바(Zorba the Greek )처럼 춤을 추어볼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