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구름잡이라 할 때는 그 실체(實體)가 없다는 말이다. 요즘 우리가 ‘구름(clouds)’이라 할 때는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기보다는 ‘데이타 구름(data clouds)’이거나 ‘네트워크 구름 (network clouds)’을 말할 정도로 자연계와 기계문명의 기술계가 구분이 분명치 않게 되었다.
지난 2015년에 출간된 저서 ‘경이로운 구름: 기초적인 미디아 철학에 대한 소고(小考) (The Marvelous Clouds: Toward a Philosophy of Elemental Media)’에서 예일대 교수로 미디어와 사회이론학자인 존 디 피터스(John Durham Peters, 1958 - )는 클라우드(clouds)가 우리의 새로운 환경으로 가까운 미래에 잡다한 모든 것들이 모두 구름속으로 들어가고, 인간의 몸이 단말기(端末機)가 되어 구름과 우리 몸 사이에 문서와 영상이 흐르는 세상이 도래할 것으로 예측한다. 우리는 매체(media)가 환경(environments)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역(逆)도 또한 진(眞)이라는 주장이다.
또 2015년에 나온 ‘모든 것의 진화: 어떻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성되는가(The Evolution of Everything: How New Ideas Emerge)’와 ‘붉은 여왕(女王): 성(性)과 인간성의 진화(The Red Queen: Sex and the Evolution of Human Nature, 1994)’ 그리고 ‘유전체(遺傳體) 게놈(Genome), 1999),’ ‘합리주의적인 낙관주의자: 어떻게 번영이 이루어지는가 (The Rational Optimist: How Prosperity Evolves, 2010) 등 베스트셀러 과학명저(科學名著)의 저자이면서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국회의원이기도 한 매트 리들리(Matt Ridley, 1958 - )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과학이란 사실을 수집해 나열해 논 카탈로그가 아니고, 새롭고 더 큰 미스터리를 찾는 일(Science is not a catalog of facts, but the search for new and bigger mysteries.)”이라고 말한다.
물질(matter)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비물질주의(immaterialism)’ 이론을 주창한 아일랜드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비숍 버클리라고도 불림. George Berkeley/Bishop Berkeley 1685-1753)는 “세상은 다 우리 마음속에 있다 (The world is all in our minds.)”라고 했다는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뜻이었으리라.
우리 선인(先人/仙人)들은 인생이 하늘의 한 조각 뜬구름 같다고 했다. 구름이 있으면 천둥번개도 있게 마련이다.
박후기(1968 - )의 시 ‘격렬비열도’가 떠오른다.
격렬과
비열 사이
그
어딘가에
사랑은 있다
오민석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며 단국대 영문학 교수는 이 시를 이렇게 풀이한다.
“그 이름도 독특한 격렬비열도는 우리나라 제일 서쪽에 위치해 있어서 ‘서해의 독도’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독도처럼 홀로 있는 게 아니라 격렬, 비열, 그리고 사랑처럼, 동격렬비열도, 서격렬비열도, 북격렬비열도 세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원래 무인고도(無人孤島)였는데 얼마 전 사람이 있는 등대가 부활돼, 조금 따뜻해졌다”며 “시인은 자연물에 인위적인 기법을 덧 입힌다. 그리고 예술은 이 기법을 경험하는 한 방식이다. 격렬하고 비열한 사랑을 해본 자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사랑은 낮아서 높고, 높아서 쓸쓸하며, 그 씁쓸함 때문에 때로 비열의 길을 걷는다. 그리하여 격렬과 비열은 쌍둥이 같다. 사랑이 늘 위태로운 이유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The Unknown Face of War: An Oral History of Women in World War II, 1985)’는 벨라루시아(Belarusia)의 저널리스트로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 1948 - )의 대표작이다. 소설가도, 시인도 아닌 그녀는 자기만의 독특한 문학 장르를 창시했는데, ‘목소리 소설 (Novels of Voices)’이라고도 하지만 작가 자신은 ‘소설-코러스’라고 부른다.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알렉시예비치는 현재 새 책 ‘영원한 사냥의 아름다운 사슴’을 탈고, 그 마무리 작업 중이라는데, 다양한 세대 간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라며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은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죽이고 죽는지에 대한 책을 써온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게 인간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제 저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지 쓰고 있어요. 사랑은 우리를 세상다운 세상으로 인도합니다. 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요. 사람을 사랑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지만요.”
정녕 세상살이가 구름잡이처럼 그 실체가 없다 해도, 또 실체라는 것이 고체(固體)나 액체(液體)나 기체(氣體)로 그 형상과 형태가 변하지만, 그 원소 H2O만큼은 변하지 않고 항상 같듯이 우주의 본질(本質)은 언제나 사랑이어라.
고드름 고추가 되든, 이슬방울이 되든, 숨찬 뜨거운 입김 아니 숨기운(氣運)이 되든, 천둥번개를 몰고 오는 사랑의 구름이어라.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사상가이며 정치철학자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o’ Machiavelli 1469-1527)도 이렇게 말했다지 않나.
“(운명/행운의 여신) 그녀는 계산적인 (마음이 늙은) 남자보단 무모한 (정열적인 젊은) 남성을 선호(選好)한다.”
“She is, therefore, always, woman-like, a lover of young men, because they are less cautious, more violent, and with more audacity command her.”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인 정호승(1950 – )의 말에 나는 ‘그러니까 사랑이다’라고 화답하리라.
남녀 간의 사랑도 그렇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도 매한가지로 자기를 마음에 두지 않는 짝사랑인 것 같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효도(孝道)란 자연의 섭리와 천리(天理)를 거슬러 치사랑을 강요하는 게 아닌가. 그 한 예가 ‘심청전(沈淸傳)’이고 그 반대는 ‘고려장(高麗葬)’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부모와 남자의 사랑이 주는 것이라면 부모와 남자의 사랑을 받는 대상으로서의 자식과 여자는 그 사랑을 부모와 남자에게 ‘받아 주는’ 것이리라. 그 사랑을 받아서 되돌려주는 것이 ‘되사랑’이라면 자식이나 여자로서는 부모와 남자의 사랑을 감사히 기쁘게 받아 주는 것으로 셈이 끝난다. 주고 싶은 사람의 사랑을 거절하지 않고 ‘받는’ 것이 ‘주는’ 일이고 주는 사람에게 주는 더 큰 선물(膳物)이 되리라.
1950년대 청소년 시절에 내가 즐겨 들은 미국 가수 해럴드 척 윌리스(Harold “Chuck” Willis 1926-1958)의 노래가 있다. ‘내가 뭣 때문에 사는데, 널 위해서가 아니라면 (What am I living for if not for you?)’이 반복되는 가사가 평생토록 내 머릿속에 아니 내 가슴 속에 늘 메아리치고 있다.
‘널 위해서’ 숨 쉰다 할 때, 이 ‘너’는 내가 짝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자식일 수도, 손자 손녀일 수도 있으리라. 다만 ‘널 위한다’는 구실로 상대방에게 부담감이나 고통을 준다면 이는 사랑이 아니고 제 욕심에 불과한 사랑의 정반대이리라. 이런 욕심과는 달리 순수한 열정이 있을 때 진정으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동시에 우주만물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그 좋은 예가 미국의 유명 가수 (singer-songwriter) ‘레이디 가가 (Lady Gaga는 예명이고 본명은 Stefani Joanne Angelina Germanotta, 1986 - )가 아닐까. 얼마 전 예술과 예술교육을 장려하는 비영리 단체가 주는 상을 받는 수상 연설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내가 커서 뭐가 될는지는 몰랐지만 난 언제나 조금도 겁먹지 않고 용감하게 우주의 열정이 어떤 것인지, 그 소리가 어떤지,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내 삶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싶었다.”
“I suppose that I didn’t know what I would become, but I always wanted to be extremely brave and I wanted to be a constant reminder to the universe of what passion looks like. What it sounds like. What it feels like.”
이 말은 ‘호기심’과 ‘열정’이 ‘사랑’과 동의어(同義語)가 된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녀처럼 우리도 모두 자신과 자신의 삶을 자신의 최고 걸작품으로 한 가락 한 가락씩 완성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내리사랑, 치사랑, 짝사랑, 되사랑, 가릴 것 없이 이 무궁무진(無窮無盡)하게 엄청난 우주의 에너지 열정으로 무지개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배를 타고 코스모스 바다로 노를 저어 보리라.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고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하고, 아무리 성한 사람도 반드시 쇠할 때가 있다고 성자필쇠(盛者必衰)라 하며, 우리가 보통 ‘태어난다’고 하는 그 생(生)도, 그 실은 무생(無生)이라는 뜻으로 생즉무생(生卽無生)이라고 한다.
‘투리토프시스 누트리쿨라(turritopsis nutricula)’라고 불리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생명체가 해양생물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어모아 활발한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모든 생물이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면치 못하지만 이 해파릿과의 생명체만큼은 늙으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계속해서 생명을 연장해 간단다.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輪廻)’가 이승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믿기지 않는 신화(神話)도 동화(童話)도 아닌 ‘생물화(生物話)’의 기적(奇蹟) 같은, 아니 기적 이상의 자연현상(自然現象)을 과학자들은 이형분화(transdifferentiation)의 원리로 설명하는데, 이 현상은 하나의 세포가 또 다른 세포로의 변형을 말한다. 그 한 예로 도마뱀이 꼬리를 잘린 다음에도 그 자리에 다시 꼬리가 생기는 경우다. 그러니 태아(胎兒/胎芽) 상태에서 성장했다가 다시 태아로 돌아가는 생명의 영생불멸(永生不滅)이 아닌가. 이 신비로운 생명체는 전 세계 바다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요즘 고령화(高齡化) 시대로 접어들어 사람이 장수(長壽)하는 것이 복(福)인지 화(禍)인지 모를 지경인데, 인간도 이 해파리처럼 죽지 않고, 늙으면 다시 젊어지고, 영원무궁토록 생명이 반복해서 연장된다고 상상해보자. 영원히 늙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이 이어진다고 상상해보면, 그렇다면 청춘의 아름다움도, 삶의 소중함도, 인생의 희노애락(喜怒哀樂)도 모르지 않겠는가. 양념이나 간이 전혀 안 된 음식을 한도 끝도 없이 먹는다고 상상해보자. 떨어져 봐야 임이고, 떠나와 봐야 고향이다. 아무리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하루 24시간 온몸이 꼭 붙어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좋은 섹스도 쉬지 않고 계속해야만 한다면, 더 이상 쾌락이 아니고 고역(苦役) 같은 중노동(重勞動)이 되고 말리라. 어둠이 없는 빛을 상상인들 할 수 있으랴. 삶도 사랑도 마찬가지 아니랴.
그렇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순간만 영원하리. 그 한 예를 들어보리라.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을 테지만, 네티즌이 2003년 최고의 감동을 준 사연으로 채택한 글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옮겨본다. 우리는 모두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들자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우리 어머니는 한쪽 눈이 없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다. 항상 다른 사람들 웃음거리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는 조그마한 노점상을 하면서 나물 같은 것들을 캐다 파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조차 정말 창피했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운동회 날, 엄마가 학교에 오셨다. 나는 너무 창피해 그냥 뛰쳐나왔다.
다음날, 학교 애들이 “00 엄마는 눈도 없는 병신이래요.”하며 놀려댔다. 나는 엄마가 차라리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엄마! 엄마는 왜 한쪽 눈이 없어? 정말 창피해 죽겠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날 밤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갔는데 어머니가 울고 계셨다. 그 모습조차 정말 보기 싫었다.
나는 가난한 환경, 한쪽 눈이 없는 엄마도 싫었기 때문에, 성공하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열심히 공부하여 당당히 서울대에 합격하였다. 세월이 흘러 나는 결혼하고, 아내와 아이, 셋이서 너무나 단란하고 행복했다. 엄마의 존재도 잊어버리니 더욱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엄마가 집에 찾아왔다. 한쪽 눈이 없는 채로 흉하게 서 있는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외면했다. 아이가 무섭다면서 울었다. 나는 왜 남의 집에 와서 애를 울리느냐고 도리어 화를 냈다. 얼마 후 동창회에 가기 위해 고향에 내려갔다. 그리고 어머니 집에 들러 보았다. 엄마가 쓰러져 계셨다. 그 모습에도 나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 곁에는 한 통의 편지가 떨어져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 보아라. 엄마는 이제 살 만큼 산 것 같구나! 이제는 서울에 안 갈께. 그래도 네가 가끔 내려와 주면 안 되겠니? 엄마는 아들이 너무 보고 싶구나. 엄마는 네가 동창회를 하러 올 거라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다. 하지만 학교에 찾아가지 않기로 했어. 한쪽 눈이 없어서 정말로 너에겐 미안한 마음뿐이다. 넌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한쪽 눈을 잃었단다. 어미는 너를 위해 내 눈을 주었단다. 그 눈으로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네가 너무 기특했다. 난 네가 엄마한테 아무리 짜증 내도 맘 편히 기댈 수 있어 그런 거라 생각했다. 아들아! 어미가 먼저 갔다고 절대 울면 안 돼. 사랑한다. 내 아들아!”
나는 갑자기 죄송함과 가슴이 무너지면서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엄마, 사랑하는 엄마! 왜 그동안 말해주지 않았어? 엄마를 미워하고 좋은 것도 대접하지 못하고 잘 입혀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사랑해요. 어머니! 그리고 감사합니다. 엄마가 병신이 아니라 제 마음이 병신이라는 걸 이제야 안 이 못난 놈을 용서하세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