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7일자 복합판(Double Issue)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지’에 기고한 글에서 공교롭다 할까, 흥미롭다 할까, 의미심장하게도, 두 사람이 똑같이 현재 전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이후의 해법으로 ‘해제(解除)’를 극력(極力) 제창(提唱) 독려하고 있다.
하나는 ‘무장해제(武裝解除, Military Disarmament)’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해제(感情解除, Emotional Disarmament)’이다.
전자(前者)는 ‘이것(코로노바이러스 위기)이 지나고 나면, 전 세계가 하나로 힘을 합해야 한다 (When this is over, the world must gather)’라는 제하의 글에서 전 소련연방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1990-1991)으로 미(美)소(蘇) 동서(東西) 냉전(冷戰)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가 이렇게 묻고 제시하는 물리적인 해법이다.
“이제 전쟁이나 무력경쟁으론 오늘날 지구촌이 당면한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전쟁은 패배의 신호등(信號燈)이고 정치의 실패작(失敗作)이다.”
“Is it not clear by now that wars and the arms race cannot solve today’s global problems? War is a sign of defeat, a failure of politics.”
후자(後者)는 1391년부터 전세된, 티베트어로는 ‘땐진갸초’라고 불리는 티베트 불교 겔룩파에 속하는 존재로 이어져 환생하는 라마, 곧 티베트 불교의 최고 수장을 가리키는 세습명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지도자로서 60년간 그가 이끈 비폭력 독립운동으로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제14대) 달라이 라마 (영어로는 Dalai Lama, 1935 - )가 ‘기도문(祈禱文)이 아니고 사상(THOUGHTS, NOT PRAYERS)’이라는 제하의 기고문에서 이렇게 역설하는 정신심리적(精神心理的)인 해법이다.
“최근에 와서 나는 ‘감정적인 해제(解除)’를 강조해 왔다; 공포감이나 분노심 같은 혼돈(混沌/渾沌)과 혼란 속으로 매몰되지 않고 사태를 현실적으로 정확하게 보려고 노력해왔다. 문제가 있다면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하고 그 어떤 해결책도 없다면 더 이상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In recent years I have been stressing ‘emotional disarmament’: to try to see things realistically and clearly, without the confusion of fear or rage. If a problem has a solution, we must work to find it; if it does not, we need not waste time thinking about it.”
2016년 3월 1일 출간된 우생(愚生)의 졸저(拙著) ‘사상이 아니고 사랑이다’의 ‘여는 글’ ‘진주’ 서두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사상이 아픔이라면 사랑도 아픔이다.
머리가 아픈 게 사상이라면 가슴이 아픈 게 사랑이다.
사상은 파괴와 착취와 살생의 괴로움을 주는 아픔이지만
사랑은 양육과 양생과 희생의 기쁨을 주는 아픔이다.
세상의 모든 싸움과 다툼이 서로 다른 사상 때문이라면
사랑은 모든 슬픔과 아픔을 치유하고 평화를 가져온다.
사상은 우리를 갈라놓지만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사상은 우리에게 서로의 다른 면만 보여주지만
사랑은 우리에게 서로의 같은 면을 보여준다.
사상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고 우리를 세뇌시키지만
사랑은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고 우리를 깨우쳐준다.
사상은 카오스를 불러오지만
사랑은 코스모스를 피우리라.
2015년 10월 28일에 개봉된 감성영화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는 남녀의 애틋한 사랑, 부녀의 가슴 저린 마음, 그리고 친구의 돌이키고 싶은 우정을 그린 영화였는데, 이 영화 제목에 들어간 세 마디가 우리 삶의 진수를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어, 이 세 마디가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로 같은 한 마디 ‘미사고’가 되리라. 미안해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고마워하는 마음일 테니까.
우리 모두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니 엄마 뱃속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아니 또 어쩌면 그 훨씬 이전 태곳적부터, 수많은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만물에게 느껴야 할 감성 아닌가.
우선 수많은 정자 중에서 선택받지 못한 정자들, 내가 살기 위해서 희생된 동물과 식물 등 수많은 제물들, 학교나 직장이나 배우자나 내가 선택되는 바람에 퇴짜맞은 수많은 경쟁자들이 다 내가 미안해하고 사랑하고 고마워할 대상으로 부지기수 아니랴.
그 범위를 줄여서 ‘배우자’와 ‘유수아동(留守兒童)’에 국한시켜 보자. 얼마 전 중국 동부 동해안 상해 인근 제장성의 수도 항조시(市)에 있는 제장(Jhejiang) 재경(財經) 대학교수 시쥬오쉬(謝作詩)가 신부감이 없어 남아도는 미혼 남성들의 심각한 사회문제 해결 방안으로 일처다부제도(一妻多夫制度)를 제안하자 찬반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는 ‘한 가정 한 아이 정책’과 남아선호(男兒選好) 사상으로 빚어진 사회현상이라고 한다. 그 결과 여아(女兒) 100명당 남아(男兒) 117명에다, 만연한 축첩(蓄妾)문화가 사태(事態)를 악화시키고 있단다.
대도시 외곽에 수만 채에 이르는 고급 아파트단지가 건설됐지만, 그 분양자의 30% 정도는 20대 초의 독신 여성으로, 당(黨)이나 정부 고관 또는 잘 나가는 기업의 간부들이 2호, 3호 등 ‘얼나이’라는 첩을 두는 게 중국 사회의 새로운 풍속도란다. 중국의 ‘얼나이’ 인구는 북경 일원에만 최소 20만 이상으로 추산되고 상해, 심천, 청도 등 연안지역의 대도시들만 따져도 그 인구는 수백만이 넘는다고 한다. 어디 그뿐이랴. 게다가 유수 아동(留守兒童) 문제도 심각하다고 한다.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이 들어선 도시로 몰려들지만 저임금에 시달리고 도시에 호적이 없어 아무런 혜택을 누릴 수 없다고 한다. 자녀를 데리고 와도 현지 학교에 보낼 수 없는 것이 중국의 호구법이라니, 돈벌이를 위해 도시로 떠나면서 그들 대부분은 자녀들을 고향에 남겨두지만 조부모가 있어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고, 먼 친척에게 맡기거나 그냥 고아처럼 방기한단다. 유수아동으로 불리는 이런 아이들이 1억 명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는 보도다.
이게 어디 중국만의 이야기일 뿐일까. 얼마 전부터 한국에선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이라지만 남한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헬 중에 헬 북한’은 말할 것도 없이, ‘헬일본,’ ‘헬미국,’ ‘헬유럽,’ ‘헬 아프리카,’ ‘헬중동,’ ‘헬남미 여러 나라’ 등 이 모두가 ‘헬지구적’인 현상 아닌가. 더구나 요즘 코로나바이러스로 온 지구촌이 어디를 막론하고 ‘생지옥’으로 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같은 가족이든 동족이든 아무리 서로 돕는다 해도 더할 수 없어 미안하고, 우리가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너무 부족하기만 하고, 내가 있게 해준 모든 사람과 만물에게 무진장(無盡藏) 고마움을 느낄 뿐이어라.
우리가 모두 하나같이 승자독식(勝者獨食)으로 우리 삶을 시작했겠지만 우리가 사는 동안만큼은 재산이고 배우자고 나눌 수 있다면 나눌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나눠야 하지 않을까. 실화 하나와 실화(實話) 같은 영화 하나를 그 예로 들어보리라.
2015년 4월 미국 위싱톤주(州) 시애틀에 있는 중소기업 그래버티 페이먼츠(Gravity Payments)의 최고경영자 댄 프라이스(Dan Price, 1984 - )는 110만 달러인 자신의 연봉을 90% 삭감해 7만 달러로 낮추고 회사의 순익을 줄여 전 직원의 최저 연봉을 7만 달러로 올려주겠다고 선언해 찬반 논란을 빚었는데 6개월 후 회사의 매출과 순익이 2배로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허핑톤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높은 연봉을 받는 직원들이 더 열심히 일하면 결국 회사에도 이익이 된다. 7만 달러 연봉은 실험이 아니라 투자다. 개인적으로는 내 연봉을 깎은 것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아이다호주(州) 시골 마을 출신인데 시애틀퍼시픽대학 1학년 때인 2004년 기숙사에서 크레딧카드 결제회사 그래버티 페이먼츠를 창업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기억하고 있겠지만 1959년 제작되어 1964년 한국에서도 상영된 영화 ‘바렌(원제: The Savage Innocents)’의 남자 주인공 에스키모인 이누이트로 분장한 ‘노트르담의 꼽추(The Hunchback of Notre Dame, 1996)’와 ‘그리스인 조르바(Zorba the Greek, 1964)’ 등의 명배우 안소니 퀸 (Anthony Quinn1915-2001)이 전도(傳道)하려고 찾아온 선교사를 환대(歡待)한다고 손님인 선교사에게 자신의 아내와 하룻밤 동침을 제안한다. 그 나머지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한다.
우리 모두 지구라는 별과 우주를 같이 나누는 입장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존재를 가능케 하는 만인과 만물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더 좀 사랑하고 나눌 수 없어 미안지심(未安之心)을 갖지 않을 수 없으며, 모두에게 한없이 고마워할 일뿐 아니랴.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모두 ‘미사고’일 수밖에 없으리라.
앞에 언급한 졸저 ‘사상이 아니고 사랑이다’에 실린 우생의 ‘박원순 서울특별시장님께 드리는 공개편지: 아이 서울 유(I. SEOUL. U)’ 풀이를 코스미안뉴스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옮겨 본다.
이젠 서울시가 만든 새 브랜드 ‘아이서울유(I.SOUL.U)’를 택시나 공공장소에서 마주치게 됐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인터넷엔 ‘아이유가 장악한 서울시’를 표현한 것이라는 식의 패러디가 넘치고, “나는 서울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며 콩글리시라는 조롱조의 폄훼가 판치자 서울시는 이 문구가 ‘서울(Seoul)을 동사형으로 활용했다’고 설명한다는데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의 한 사람으로 서울시민과 한국인 모두에게 극히 외람되나마 한 말씀 드리고 싶어 몇 자 적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아야 한다’는 말처럼 매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풀이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나지 않습니까. 개인이고 국가이고 간에 자중자애(自重自愛)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비하할 때 아무에게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법입니다.
2015년 10월 31일자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한국에 살며’라는 칼럼에 ‘한국인의 삶은 지옥인가’에서 영국인 배리 웰시 숙명여대 객원교수 겸 서울북앤컬처클럽 운영자는 다음과 같이 ‘헬조선’ 개념을 요약한 후, “이러한 이유로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한다”며 “이는 국가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헬조선 개념에 따르면 한국은 평범한 사람은 배척시키고 끝내 굴복하게 만드는 잔인한 사회구조를 가진 곳이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공부해야 하며 남자의 경우 군대에 가야 한다. 또한 취직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많은 이들이 세계 최장 시간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한국의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여러 가지가 문제가 되며, 낮은 수준의 삶을 사는 것으로 느낀다. 반면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면 낙하산과 인맥을 통해 혜택을 누리기 때문에 이러한 한국 사회의 잔인함을 피해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정의롭지 못한 특혜를 누리며 즐겁게 살아간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온실의 화초’가 못된 걸 한탄하고 비관, 절망한다는 말인데, 젊은이들이 간과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과 진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니고 온실의 화초는 결코 큰 나무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대기업 창업자들을 비롯해 오늘날 젊은이들의 부모와 조부모는 하나같이 온실의 화초가 아닌 잡초 억새풀들이었습니다.
일정시대인 1936년, 평안북도 태천에서 태어나 8.15, 6.25, 4.19, 5.16 다 겪고, 영국과 미국으로 떠돌면서 인생 80년 살다 보니 깨닫게 된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이 ‘진리’란 단지 탁상공론으로 성경, 불경, 도덕경 등 성인군자들의 가르침이 아니고, 제가 살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몸소 체득한 것입니다.
나 ‘아이(I)’ 너 ‘유(U)’ 사이에 ‘서울(Seoul)’ 그리고 우리 서로 사랑(Love)하면 ‘넌 나가 되고(U become Me)’ ‘난 너가 되는(I become U)’ 동시에 ‘너’와 ‘나’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대우주(Macro-cosmos)’의 축소본인 ‘소우주(Micro-cosmos)’가 아닙니까. 우리는 작은 별들로서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이란 말입니다.
망언다사(妄言多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