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10월 1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아띠홀에서 있었던 제1회 코스미안상 시상식과 응모작 선집 ‘69 프로젝트’ 출판 기념회에서 코스미안뉴스 회장으로서 응모해주신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진주 같은 삶, 무지개 같은 사랑의 노래를 불러주신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다 하나같이 자축하실 일이라고 축원했다.
응모작 선집 ‘69프로젝트’에 실린 글들 가운데 ‘노숙인의 DNA’에서 예정옥 님은 적절한 예를 들어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어디선가 들은 얘기가 떠오른다. 누가 선물을 줬는데 기쁜 마음으로 열어보니 안에 쓰레기가 들어있었다. 실망스럽고 농락당한 것 같아 화가 난다. 그렇지만 ‘쓰레기네.’ 하고 버리면 그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행동한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틈만 나면 선물 상자를 열어보면서 ‘어떻게 나에게 쓰레기를 줄 수 있지?’ 분노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다 무엇보다 귀중한 ‘삶’이란 엄청나게 큰 선물을 받은 것이고 순간 순간 보고 듣고 느끼며 겪게되는 모든 사물(事物) 곧 만 가지 일과 우주 자연 만물이 그 어떤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 중에 선물 아닌가. 이러한 선물을 보배로 간직할 것인지 아니면 쓰레기로 버릴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사항임에 틀림 없으렷다.
근친교배(近親交配)라 했던가. 우리말로 ‘끼리끼리’ 영어로는 ‘Like attracts like.’라고, 세상은 거울과 같아 내가 웃으면 세상도 웃고 내가 울면 세상도 울지 않던가.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읽고 보든 각자는 각자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리라.
악한 반응(response)을 우리말로 줄여서 ‘악플’이라 한다는데 이 악플 때문에 자살까지 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니 이 얼마나 안타깝고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자신의 존재가치는 천부지재(天覆地載 ) 천지의 큰 사랑이고, 스스로가 대우주 축소판인 소우주인데, 그 어찌 나 아닌 다른 그 어느 누구의 반응에 휘둘릴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옛말에 같은 이슬이라도 매미가 먹으면 노래가 되고 벌이 먹으면 꿀이 되나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지만 독조차 약이 될 수 있지 않던가.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이 그의 ‘예언자(The Prophet, 1923)’에서 말하듯이
“길 가다 누가 넘어지면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발부리에 걸리는 돌 있다
조심하라 일러주는 것이리”
“And when one of you falls down
he falls for those behind him,
a caution against the stumbling stone.”
그러니 ‘악플’ 다는 사람들을 ‘반면교사’ 큰 스승으로 모시고 '십자가’를 나 대신 져주는 희생자로 고맙게 여길 일이어라. 옛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인을 보면서 그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영국의 한 재판장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신의 은총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바로 저 죄인이었을 텐데.... But for the grace of God, there go I....”
이를 요즘 유행어로 말하자면 ‘미사고(미안해 사랑해 고마워)’가 되리라. 동시에 또한 제1회 코스미안상 응모작 선집 ‘69 프로젝트’에 실린 글들 가운데 고승우 님의 심오하고도 해박한 두 편의 에세이 ‘인간이란 무엇이고 그 미래는’ 그리고 ‘세상사 복잡하지만 큰 원칙의 틀 안에 있어’는 우리 인류의 미래상을 더할 수 없도록 명쾌하게 제시한다.
그는 서두에 “인간의 정체는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의 하나인가, 아니면 신과 동물의 중간, 혹시 신비한 존재인가”라고 원초적이고 실존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인면수심의 부정적인 측면도 인간의 DNA에 들어있다는 점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자세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개탄할만한 그런 자질들이 인간의 됨됨이 속에 포함된다 해도 본질적인 면에서 중시할 점을 경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류는 한 조상의 후예로 5대양 6대주의 문화 문명이 꽃 핀 것은 인류의 유전적 자질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역겨운 인간의 자질 몇 가지 때문에 망각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20세기 전후에 ‘인간이 곧 하늘이다’라는 사상이 나온 것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 다 함께 상상 좀 해보자. 인간에게 신적인 신성만 있어 신처럼 완전무결하고 완벽하다면 이야말로 인공지능의 로봇과 무엇이 다르랴! 인간에겐 짐승과 같은 수성(獸性)도 있기에 우리가 인격 이상의 신격으로 상승할 수도 아니면 인격 이하의 수격(獸格)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취사 선택의 자유가 있는 신비스러운 존재가 아닌가 말이다.
이어서 고승우 님은 그의 두 번째 에세이에서 “세상사가 변화무쌍하지만, 그것은 큰 틀에서 우주의 법칙 속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무질서한 것 같아도 큰 질서 속의 무질서인 것이다. 이런 이치를 깨달았을 때 지구촌의 앞날이 더 긍정적이 될 것이다.”라고 낙관한다.
옳거니! 우리의 큰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라 해도 각자는 각자대로 작은 그림을 그리다 보면 물방울들이 모여 대양을 이루듯이 큰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리. 이를 진인사대천명이라 하던가.
정녕 이상과 현실은 하늘과 땅이렷다.
양자 간에는 무한한 거리가 개재한다.
하늘이 땅일 수 없듯이
땅이 하늘일 수는
그 더욱 없으리라,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신은 하늘에서 살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짐승은 땅에 산다면
신과 동물의 튀기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은
어디서 살아야 할까.
모든 인간은 현실을 초월할 수도 망각할 수도 없기에 땅을 밟고 산다. 그렇지만 얼굴만은 하늘을 우러러 살아야 하리라. 이것이 인간 된 도리이리라. 진실로 이상은 정말 실현될 수 없는데 그 뜻과 의의가 있으리. 하늘이 끝도 한도 없이 높은 것처럼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을 추가함으로써 인간은 끝없이 노력하고 따라서 한없이 발전 향상할 수 있으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윤동주와 같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염원하고 기원하면서 영원한 ‘인간 수수께끼’를 풀어볼 수밖에 없어라.
그동안 최근세에 와서 서구의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전 세계로 범람하면서 거의 모든 나라 모든 사회에서 사람을 포함해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왔다. 특히 연말이면 예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크리스마스 선물 쇼핑으로 아우성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역병 코비드19로 금년 말에는 어떨는지 몰라도.
미국의 단편소설작가 오 헨리(O. Henry, the pen name of William Sydney Porter1862-1910)의 ‘현자(賢者)의 선물(The Gift of The Magi, 1905)’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상업화된 명절의 거의 무의미하고 요란한 소비문화가 낳은 폐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어린이들을 위해 가공 허탄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등장시켜 퍼붓는 선물세례라지만 이 관습이 얼마나 진정으로 어린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인지 심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5년 전 초등학교에 들어간 내 외손자 일라이자(Elijah)가 하나님은 어디 있고, 남자냐 여자냐, 생뚱맞게 묻는다. 이런 질문에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어떤 해답을 그 누가 해줄 수 있을까.
2007년 9월 카네기 멜런 대학의 컴퓨터과학 교수 랜디 파우쉬(Randy Pausch1960-2008)는 췌장암으로 사망하기 10개월 전 행한 그의 ‘마지막 강의(The Last Lecture)’에서 무엇보다 동심의 경이로움을 극구 강조하면서 어린 애들이 침실은 물론 집안 모든 벽면에 마음대로 그림도 그리고 낙서하도록 했다고 했다. 비싼 고가의 세계 명화들을 걸어 놓기보다 이 얼마나 비교도 할 수 없이 소중하고 훌륭한 애들의 아름다운 걸작품의 산실이오 전시장인가!
얼마 전 그림 경매에서 두 번째 고가로 유대계 이탈리안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의 1917년작 그림 ‘누워있는 나부(Lying nude)’를 1억 7,040만 달러에 낙찰받은 중국부자 류이첸(당시 52세)이 화제가 되었었는가 하면 캐나다에서 있었던 다음과 같은 실화는 상품의 허상과 사랑의 실상을 너무도 여실히 보여준다. 캐나다에서 있었던 실화를 소개한다.
한 남자가 어려서 학대를 받았으나 열심히 노력 끝에 자수성가했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아들이 생겼고 선망의 대상이자 인생의 목표인 최고급 스포츠카를 구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차고에서 차를 손질하러 들어오던 그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린 아들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못을 들고 최고급 스포츠카에 낙서를 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이성을 잃은 그는 손에 잡히는 공구로 아들의 손을 가차 없이 내리쳐버렸고, 아들은 대수술 끝에 결국 손을 절단해야 했다. 수술이 끝나고 깨어난 아들은 아버지에게 잘린 손으로 울며 빌었다.
“아빠, 다신 안 그럴게요. 용서해주세요.”
이 어린 소년의 아버지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갔고, 그날 저녁 차고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가 본 것은 차에 그의 아들이 남긴 낙서였다.
“아빠, 사랑해요”
상품 같은 미인이 되려고 성형수술을 받다가 미인은커녕 괴물이 된 수많은 사람이 있다지만, 몸짱이 되려다 1년 만에 할머니가 된 여성 보디빌더가 있다. 2015년 11월 24일 ‘데일리 메일’은 러시아 노보시르스크에 사는 안렉산드라 루덴코 (당시 24세)라는 한 여성 보디빌더의 사연을 소개했다.
보도에 따르면 루덴코는 그동안 세계 피트니스 챔피언십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운동을하며 몸을 키워왔다. 한시도 쉬지 않고 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루덴코. 그 덕분에 탄탄한 허벅지 근육은 물론 완벽한 식스팩까지 잘 유지할 수 있었다.
루덴코는 그 이후 대회 출전을 앞두고 자신의 SNS에 그동안의 달라진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했다. 하지만 1년 전 젊고 건강미 넘치던 그녀의 모습과는 달리 루덴코는 말 그대도 백발의 노인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는 진짜 보배로운 자신을 기리는 보배 ‘보’ 자신의 ‘자’ 기리는 ‘기’ 이 세 글자를 합성해 만든 단어 ‘보자기’ 대신 신기루 같은 거짓된 미라지(mirage), 곧 거짓된 ‘거’ 자와 미칠 ‘미’ 자를 붙인 ‘거미’줄에 목을 매지 말라는 산 교훈이리라.
사실인지 지어낸 얘기인지 몰라도 내가 젊었을 때 듣기로는 제주도 방언 사투리로 ‘보자기’는 여자의 성기를 의미한다고 했다. 크든 작든, 길든 짧든, 어떤 색감 어떤 생김새이든, 웬만한 물건이면 다 잘 쌀 수 있는 보자기의 용도를 생각해 보자. 요즘 사용되고 있는 수많은 종류의 가방이 생기기 전에는 보자기가 우리나라에서는 필수품이었다.
이렇게 물체가 뭐든 담을 수 있는 물질적인 ‘몸의 보자기’ 용도가 크겠지만, 무궁무진하게 무한히 더 큰 게 ‘마음의 보자기’가 아닌가. 우주 만물을 다 품는 ‘바다의 마음 해심(海心)’ 같은 보자기 말이어라.
2015년 11월 27일자 중앙일보 일간스포츠지 차길진(車吉辰, 1947-2019) 법사(法師)의 ‘갓모닝’ 칼럼 ‘마음의 보자기를 키울수록 후회는 줄어든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흔히 심보라는 얘기를 한다. 사람을 두고 심보가 작다. 심보가 좋다. 심보가 고약하다 등의 말을 한다. 심보는 마음 ‘심(心)’에 ‘포대기 보(褓)’를 써서 마음의 보자기라는 뜻도 갖고 있다. 밥상보에는 이 세상 모든 종교를 하나로 끌어안는 따뜻한 정서가 있다. 모두가 좋아하는 떡처럼 입에 들어가는 것에 좋고 나쁜 것이 어디 있을까. 밥상보야말로 넉넉한 마음의 보자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기하게도 다른 보자기들과 달리 마음의 보자기, 심보는 자꾸 자라난다. 우리가 도(道)를 공부한다는 것은 즉, 마음의 보자기를 키우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미숙했던 시절 내 마음의 보자기가 얼마나 작았는지 돌아보면서 끊임없이 마음의 보자기를 넓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 가지가 없어야 한다고 한다. 첫째 책임지는 일을 하면 안 된다. 둘째 경쟁을 하면 안 된다. 셋째 내 욕심만 채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욕심을 버리는 것 자체가 욕심이요, 욕심이 없는 것도 욕심이다. 차라리 욕심을 버리기보다 그 욕심까지 감쌀 수 있는 마음의 보자기를 넉넉하게 만드는 공부가 더 중요하다.”
어쩜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이런 공부를 열심히 해온 것만 같다. 해심(海心)이란 자작 아호(雅號)까지 써가면서 인생공부에 매진했다.
바다
영원과 무한과 절대를 상징하는
신의 자비로운 품에 뛰어든 인생이련만
어이 이다지도 고달플까.
애수에 찬 갈매기의 고향은
출렁이는 파도 속에 있으리라.
인간의 마음아
바다가 되어라.
내 마음
바다가 되어라.
태양의 정열과
창공의 희망을
지닌
바다의 마음이
무척
부럽다.
순진무구한 동심과
진정한 모성애
간직한
바다의 품이
마냥
그립다.
비록
한 방울의
물이로되
흘러흘러
바다로
간다.
이렇게 내가 나의 어머님 뱃속에서, 아니 어쩌면 태곳적 옛날 바다의 품속에서 받은 태교육을 이 세상에 태어난 다음에도 계속 받고 자란 탓인지 내 나이 열 살 때 지은 이 동시 아니 주문(呪文)을 내 인생 83여 년 살도록 밤낮으로 쉬지 않고 숨 쉬듯 나는 이직도 외고 있다.
내 마음도
네 마음도
밀물 썰물
파도 치듯
우리 가슴
뛰는 대로
우리 고향
코스모스
저 바다로
돌아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