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태양의 후예’ 송중기가 정-재계 여성리더들의 모임 ‘미래회 바자회’에 그의 애장도서인 ‘아이처럼 행복하라(알렉스 김 지음 공감의기쁨 2012년 3월 27일 출간)’를 기부했는데 그 책의 판매가 급증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책 제목만으로도 행복하지 못한 모든 어른들에게 너무도 절실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독서 인구는 준다는데도 수많은 책이 계속 출간되고 있지만 어떤 책이 읽히는 것일까. 그 해답을 JTB ‘톡투유-걱정말아요 그대’ MC 김제동이 내놓았던 것 같다. 한국에서 엑스트라 취급 받고 사는 사람들이 끽소리 내는 프로그램 진행 1주년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좋은 방송이 뭐냐고 묻자 김제동은 “재미만 있으면 허무하고, 의미만 있으면 지루하다. 원래 주인공인 사람들을 자기 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4월 23일은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죽은 지 404년이 되는 날이었다. 유네스코는 이 날을 ‘세계 책의 날’로 정해 기리고 있다. 신(神)과 내세(來世) 중심이던 내러티브를 인간의 현세로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대표적인 서양의 작가가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라고 할 수 있으리라.
셰익스피어 작품의 주인공들이 주로 왕족이나 귀족이었다면, 성경 다음으로 널리 번역되고 2002년 노벨 연구소가 세계 주요 문인들을 상대로 한 여론 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책’ 1위로 뽑힌 돈키호테’는 다들 알다시피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는 편력 기사 돈키호테와 하인인 산초 판사가 함께하는 수많은 모험 이야기를 통해 겉모습과 그 실체, 현실과 이상, 존재와 당위 같은 인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세르반테스가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우리 심사숙고해 보자.
“너무 정신이 멀쩡한 거야말로 미친 것인지 모를 일이다. 미친 일 중에 가장 미친 일이란 살아야 할 삶이 아닌 주어진 삶을 주어진 그대로 사는 일이다.”
“Too much sanity may be madness and the madness of all, to see life as it is and not as it should be.”
그럼 살아야 할 삶이란 어떤 삶일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아이처럼 행복하게’ 사는 삶이 아니랴. 돈키호테처럼 살아 보기가 아닐까.
1605년 이 소설이 나오자마자 큰 인기를 얻었고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는 길가에서 책을 들고 웃고 우는 사람을 보고 “저 자는 미친 게 아니라면 돈키호테를 읽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2014년 12월 ‘돈키호테’ 1, 2권을 5년 넘게 매달린 끝에 모두 1,600쪽이 넘는 우리말 번역서를 완역한 안영옥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흔히 엉뚱한 괴짜나 황당한 사람을 두고 돈키호테 같다고 하지요. 하지만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돈키호테 원작을 제대로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처음엔 낄낄대며 웃지만, 마지막 장을 닫고 나면 울게 되는 책이지요. 데카르트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지만, 돈키호테는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보고 돌진하고, 양떼를 군대로 보고 싸우는데 그가 싸운 괴물의 정체는 당시 스페인의 억압적인 정치 종교 체제입니다. 주인공을 광인으로 설정한 것도 검열이나 법적 구속에서 자유롭기 위한 장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웃음으 로 모든 권위를 해체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번역서 마지막 부분에는 돈키호테가 죽고 난 후 그의 묘비명이 나온다.
“그 용기가 하늘을 찌른 강인한 이달고 이곳에 잠드노라. 죽음이 죽음으로도 그의 목숨을 이기지 못했음을 깨닫노라. 그는 온 세상을 하찮게 여겼으니, 세상은 그가 무서워 떨었노라. 그런 시절 그의 운명은 그가 미쳐 살다가 정신 들어 죽었음을 보증하노라.”
안 교수는 돈키호테 2권 423번 각주에 이렇게 적었다.
“돈키호테가 미쳐서 살다가 제정신을 찾고 죽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이 대목은 우리에게 심오한 삶의 교훈을 준다. 이성의 논리 속에서 이해관계를 따지며 사는 것이 옳은 삶인지, 아니면 진정 우리가 꿈꾸는 것을, 그것이 불가능한 꿈이라 할지라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 옳은 삶인지를 말이다.”
아, 모든 아이는 돈키호테나 김삿갓처럼 우주의 나그네 코스미안으로 태어나는 거라면, 우리 모두 현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일깨워주고 있는 오늘날의 새로운 시대정신의 화신으로서 개명천지 코스미안 시대를 열어볼거나. 우린 모두 살아 숨 쉬는,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삶의, 아니 우주의 책이니까.
스웨덴의 심리학자 케이 앤더스 에릭슨(K. Anders Ericsson, 1947 - )은 수십 년간의 연구조사를 통해 ’10,000시간 법칙(the 10,000 Hour Rule)’을 발견,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무슨 일이든 성취해 성공하려면 최소한 10,000시간을 들여 그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는 말로, 영어 속담에도 있듯이 ‘연습이 완벽을 기한다(Practice makes perfect)는 뜻이다. 우리말에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노력보다 훨씬 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영감(靈感)’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영감 없이 쏟는 노력은 도로(徒勞)에 그치고 말 테니까. 이 영감이란 단어는 영어로 ‘inspiration’이라 하는데 라틴어인 ‘inspirare’에서 유래한 말로 ‘숨을 불어 넣는다 (to breathe into)’란 의미이다.
예부터 부지 부식 간에 시도 때도 없이 불현듯 생각이 떠오르는 게 마치 어디선가 한 줄기 신선한 돌풍이 느닷없이 불어오듯 말이다.
미국 메뫄 작가(memoirist) 로저 로젠블라트(Roger Rosenblatt, 1940 - )는 그의 에세이 ‘그게 전부인가(Is That All There Is)의 결론 부분에서 이런 영감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어찌 보면, 모든 글은 에세이 쓰기다. 호러에서 미(美)를, 결핍에서 숭고함을 발견하려는 끝없는 시도이다. 벌과 상 그리고 사랑을 거부하는, 자연적인 모든 인간사에서 처벌하거나 포상하고 사랑하려는 노력 말이다. 이는 아주 힘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로서 마치 신(뭐라 하든 신적인 존재)을 믿는 일과 다르지 않다. 때로는 글을 쓰는 동안 내가 다른 누군가의 디자인에 따라 어떤 하나의 예정된 기획의 일부를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그동안 내가 한 모든 일들을 돌이켜보면서 생각하리라. 이게 신이 내게 의도한 전부일까. 하지만 그것이 내게 주어진 전부이어라.”
“In a way, all writing is essay writing, an endless attempt at finding beauty in horror, nobility in want – an effort to punish, reward and love all things human that naturally resist punishment, rewards and love. It is an arduous and thankless exercise, not unlike faith in God. Sometimes, when you are in the act of writing, you feel part of a preordained plan, someone else’s design. That someone else might as well be God. And then one day you rear back and survey everything you have done, and think, Is this all God had in mind. But it’s all you got.”
그런데 이런 영감이란 우리 머리와 가슴이 그 어떤 선입견과 편견이나 고정관념 또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지 않고 텅 비어 있을 때라야 생길 수 있는 신비스런 현상이리라.
아,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컨트리 음악 가수 지미 딘(Jimmy Dean 1928-2010)도 이렇게 말했으리라.
“바람이 부는 방향을 바꿀 수는 없어도 내 돛을 언제나 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맞출 수는 있다.”
“I can’t change the direction of the wind, but I can adjust my sails to always reach my destination.”
그리고 미국의 시각, 청각 중복 장애인으로서 작가, 교육자,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약했던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도 이렇게 말했으리라.
“세상에서 제일 좋고 아름다운 것들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가슴으로 느껴야만 한다.”
“The best and most beautiful things in the world cannot be seen or even touched. They must be felt with the heart.”
또 미국의 흑인 여류 시인 마야 앤저로우(Maya Angelou 1928-2014)는 이렇게 역설한다.
“누군가의 구름에 하나의 무지개가 되도록 노력하라.”
“Try to be a rainbow in someone’s cloud.”
그뿐만 아니라 이런 말도 있지 않나.
“우리의 삶이란 우리가 놓치는 것들까지를 포함한 수많은 기회로 정의되고 한정된다. (Our lives are defined by opportunities, even the ones we miss.)
오늘날 전 세계 온 인류가 겪고 있는 코로나 사태라는 이 엄청나 게 큰 위기 또한 그만큼 엄청나게 큰 변혁의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할 일 아니랴.
그런데 미국의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은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회를 놓치는 건 그 기회가 작업복을 입고 있거나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Opportunity is missed by most people because it is dressed in overalls and looks like work.”
이 말은 우리 모든 어른들도 세상살이 인생살이를 어린아이들 소꿉놀이하듯 즐기라는 뜻이리라.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그 어떤 영감이나 사랑도 못 느끼면서 로봇같이 기계적으로 노력하거나 마지 못해 억지 쓰듯 습관적으로 사는 삶이 아닐까.
우리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한 구절 음미해보리라.
제 안에 음악이 없는 인간,
감미로운 음의 선율에도 감동할 줄 모르고,
배신과 계략과 약탈만 일삼는다.
그의 정신력은 밤처럼 아둔하고
그의 감성은 에레부스
(카오스에서 태어난 태초의 암흑)처럼
캄캄하다.
그런 사람을 믿지 마라.
음악을 기리라.
The man that hath no music in himself,
Nor is not moved with concord of sweet sounds,
Is fit for treasons, stratagems, and spoils;
The motions of his spirit are dull as night,
And his affections dark as Erebus.
Let no such man be trusted.
Mark the music.
아, 너도나도 우리 삶은 음악이 되어라. 그러자면 우리 삶에 사랑이 있어야 하리라. 그리고 모든 영감이란 사랑에서 뜨는 무지개이리.
그리고 이 사랑이란 것도 새장 같은 그 어떤 틀에 박힌 것일 수는 없으리라.
얼마 전 미국 유타주의 한 빈민가 식당에서 일곱 가족의 식대를 대신 내고 유유히 사라진 한 남성이 화제였었다. 소셜 미디어에서 ‘미지의 남성(The Mystery Man)으로 불린 의문의 주인공 이 한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KRIV에 따르면 이 남성은 유타에 있는 대중 간이식당 데니스 (Denny’s)에서 식사를 한 뒤 총 2,521달러를 지불했다. 자신의 식대는 단 21달러였다. 1,000달러는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중 이던 사람들의 음식값이었다. 서빙을 한 직원에게도 1,500달러에 달하는 팁을 줬다.
그는 2시간 동안 사람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앉아 있다가 신원을 밝히지 않은 채 떠났다. 그러나 이렇게 거액의 팁을 받은 직원이 이 남성의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미담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페이스북 게시물에는 ‘좋아요(Like)’를 39만 개 이상 받았으며 17만 5,000 이상의 공유를 기록했다.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매우 가난하게 자랐다. 집이 없어 어머니 친구 집을 전전했다. 그래서 어머니 친구분들의 도움이 너무 감사했다. 그럼에도 나는 폭행을 일삼다 감옥에도 갔고, 많은 문제를 일으킨 청소년이었다. 운이 좋게도 어른이 되어서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이제는 받았던 도움을 돌려줄 때라 생각했다.”
팁을 받은 직원은 자신이 집이 없어 복지 시설을 전전하는 홈레스(homeless)였었는데 “1,500달러로 당분간 지낼 곳을 마련했다. 눈물 나게 고맙다. 당시 식사를 했던 일곱 가족들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었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그 영문 일부만 옮겨 본다.
“Today I met an angel. You came into a Denny’s I work at in Utah. You asked me, ‘Can I have a waitress who is a single mother?’ I thought it was very odd, but I sat you in Crystal’s section. You sat there for 2 hours just watching people. Seven families came in and ate while you were there and you paid every one of their bills, over $1,000 you paid for people you didn’t even know. I asked, ‘Why did you do that’? You simply said, ‘Family is everything. I’ve lost all mine.’”
‘가족이 전부다.(Family is everything.) 난 내 가족을 다 잃었다. (I’ve lost all mine.)’는 이 사람이야말로 제 소(小)가족을 잃은 대신 제 대(大)가족인 인류라는 ‘인간가족’을 찾아 얻었음에 틀림없어라.
이런 사랑은 또 ‘인간가족’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주 만물에 적용되는 것이리라.
매년 5,000 마일을 멀다 하지 않고, 생명의 은인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펭귄이 있어 화제다. 2012년 브라질 리우데자이네루 (Rio de Janeiro)에 있는 작은 섬 해안에서 기름투성이가 되어 굶주린 채 죽어가던 마젤란 펭귄(Magellanic penguin) 한 마리를 주앙 페레이라 드 수자(Joao Pereira de Souza 당시 71세) 씨가 발견하여, 깃털에 달라붙어 있는 검은 타르를 정성껏 닦아주고 물고기를 잡아 먹여 살렸던 것이다. 11개월을 함께 지낸 어느 날, 딘딤(Dindim)이란 이름의 이 펭귄은 돌연 모습을 감추었고,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딘딤은 해마다 6월이 되면 할아버지를 찾아와서 8개월을 같이 지낸 후 번식기인 2월이 되면 아르헨티나나 칠레로 돌아간다. 할아버지는 딘딤을 자신의 친자식처럼 사랑하며, 딘딤도 할아버지를 좋아한다.
서양에선 20세기 초엽부터 꿈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온 ‘lucid dream’이란 말이 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꾸는 꿈을 일컫는데, 우리말로는 자각몽(自覺夢)이 되겠다.
우리가 밤에 자면서 꾸는 꿈뿐만 아니라 잠에서 깨어나 사는 우리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자각몽이라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아무것, 아무 일에도 너무 집착하거나 지나치게 심각할 필요가 전혀 없으리라.
다만 내가 만나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물과 사람을 통해 만인과 만물을, 아니 나 자신을 가슴 저리고 아프게 죽도록 미치도록 사랑할 뿐이어라.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각자는 각자 대로 살아 숨 쉬는,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삶의, 아니 우주의 책을 쓰고 읽는 것이 되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