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사전엔 냉소주의의 뜻이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정한 사회의 관습, 전통, 도덕, 법률, 제도 따위를 부정하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활할 것을 주장하는 태도나 사상이지만, 비관적 태도가 지나쳐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를 다시 좀 풀이해보자면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2016년 5월호 미국의 지성 월간지 하퍼스(HARPERS) 권두사(卷頭辭) ‘안락의자(Easy Chair)’의 ‘매우 냉소적인 사람들의 습성(The Habits of Highly Cynical People)’에서 필자인 미국 작가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 1961 - )은 지적한다.
“단순하고 순진한 냉소주의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나 사태의 복합성은 물론 모든 가능성을 묵살하고 부정해버린다.”
“Naïve cynics shoot down possibilities, including the possibility of the full complexity of any situation.”
그러나 변화와 불확실성을 수용하려면 사고의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필자는 역설한다.
“이 융통성이란 좀 더 느슨한 자아의식으로 사태에 다양하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어쩜 그래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한정된 성공을 불안해하는지 모르겠다. 실패로 다시 돌아가는 게 일종의 방어기제가 되고 있다. 지상의 삶이 제공하는 언제나 불완전하면서도 중요한 승리를 궁극적으로 외면하려는 기술이다. 그 정도와 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사물을 이쪽 아니면 저쪽, 한통속으로 몰아 넣어버리는 버릇 말이다.”
“Accommodating change and uncertainty requires a looser sense of self, an ability to respond in various ways. This is perhaps why qualified success unsettles those who are locked into fixed positions. The shift back to failure is a defensive measure. It is, in the end, a technique for turning away from the always imperfect, often important victories that life on earth provides-and for lumping things together regardless of scale.”
그러면서 필자는 그 대안도 제시하고 있다.
“단적인 냉소주의의 대안은 무엇인가. 벌어지는 사태에 대한 수동적이 아니고 능동적인 대응책이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사전에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어떤 일이 생기든 대개는 축복과 저주의 혼합임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단적인 냉소주의는 세상보다 냉소주의 그 자체를 더 사랑하면서 세상 대신 스스로를 변호하고 두둔한다. 나는 어떤 주의나 사상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갖게 되며 날이면 날마다 소재에 따라 변하는, 이들이 하는 말을 경청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이란 우리가 뭘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행동이란 가능성에 개방적이고 복합성에 자극되는 데서 비롯하는 까닭에서다.”
“What is the alternative to naïve cynicism? An active response to what arises, a recognition that we often don’t know what is going to happen ahead of time, and an acceptance that whatever takes place will usually be a mixture of blessings and curses. Naïve cynicism loves itself more than the world; it defends itself in lieu of the world. I’m interested in the people who love the world more, in what they have to tell us, which varies from day to day, subject to subject. Because what we do begins with what we believe we can do. It begins with being open to the possibilities and interested in the complexities.”
이 논지를 내가 단 한마디로 요약해본다면 ‘인간만사와 세상만사엔 언제나 양면이 있음을 잊지 말자’는 얘기인 것 같다. 이를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인종과 문화의 종합세트 같은 나라 미국의 정치와 경제, 특히 올해 대선 공화와 민주 양당의 후보 도널드 트럼프와 조 바이든을 통해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올해 민주당 후보인 조 바이든이 거의 무색무취(無色無臭)인 반면 도널드 트럼프는 좀 지나칠 정도로 유색유취라 한다면, 이번 민주당 대선 주자인 조 바이든보다 지난번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대비시켜 보자.
막가파식 거친 막말을 거침없이 해대는 트럼프와 논리 정연하게 이지적으로 세련된 클린턴은 정 반대 극과 극의 대조적인 것처럼 보였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외양처럼 그 실체도 실제로 그런 것이었을까.
클린턴을 ‘위선자’라 한다면 트럼프를 ‘위악자’라 부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2008년 대선 때 오바마의 선거 참모로 활약한 데이빗 액셀로드(David Axelrod, 1955 - )는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트럼프를 ‘늑대 탈을 쓴 양(a sheep in wolf’s clothing)’이라고 지칭했다.
트럼프 자신도 언론인들에게 사석에서 실토했다고 한다. 투표할 유권자와 대중매체의 주의와 관심을 끌기 위해 과장해서 하는 자신의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며, 자신이 뜻하거나 의미하지 않으면서 마구 지껄이는 말들은 그냥 ‘쇼’로 봐달라고 했다지 않나.
그리고 1%가 99%를 착취한다고 버니 샌더스가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대선 예비 선거 운동 기간 입에 거품을 물고 성토했지만,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페이스북의 마크 저크버그 등 많은 기업인들이 창출한 기업이윤 대부분을 자선사업으로 사회에 환원하고 있지 않은가.
몇 년 전 보도된 또 한 예를 들어보자.
경영진과 직원들의 지나친 임금 격차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논란 이 되는 가운데, 미국의 유명한 요거트 브랜드인 ‘초바니 (Chobani)’ 회장이 2016년 4월 26일 직원들에 대한 보상 강화 차원에서 회사 지분의 10%를 전 직원에게 약속했다고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들은 회사 성장의 결실을 직원들과 나누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소개했다.
주인공은 그리스식 요거트, 일명 ‘그릭 요거트(Greek Yogurt)’로 억만장자가 된 함디 울루카야(Hamdi Ulukaya, 1972 - ) 회장으로 터키 이민자 출신인 그는 2005년 초바니를 만들었으며 이 회사의 가치는 (2016년 기준) 적게는 30억 달러에서 많게는 70억 달러로 추산되었었다.
울루카야는 “회사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일한 2,000여 명의 직원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제 직원 스스로 각자의 미래를 만들어가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발표 뒤 직접 주식이 담긴 봉투를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회사 가치를 최소치인 30억 달러라고 해도 직원들이 평균 15만 달러어치의 주식을 받게 된 것이다. 장기 근속자는 100만 달러가 넘어 곧바로 백만장자 대열에 들어서게 됐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2015년 미국의 전자결제 업체인 그래비티 페이먼츠(Gravity Payments)가 직원들의 최소 연봉을 이 회사 최고 경영자(C.E.O.)와 같은 7만 달러로 책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초바니의 주식 분배도 기업 이익을 직원들에게 적극적으로 환원하는 조치라고 평가했다.
그러니 냉소주의자가 되느니 우리 모든 사람과 사물에서 최선의 가능성을 찾아보리라.
나도 즐겨 시청하는 MBC 예능프로그램 ‘일밤-복면가왕’에서 18주 동안 9연승을 올리면서 수많은 명곡을 ‘레전드 무대’로 만들어 시청자들과 팬들에게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기고 151일만에 가면을 벗은 ‘우리 동네 음악대장’ 하현후(국가스텐)가 10연승을 달성하지 못한 것을 본인 자신을 위해 천만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미완의 여백과 여운을 남겨서…
특히 그가 부른 신해철(1968-2014)의 노래 ‘Lazenca, Save Us’와 ‘일상으로의 초대,’ ‘민물장어의 꿈’ 3곡이 지냔 2016년 6월 5일 ‘복면가왕’ 방송 이후 음원으로 출시되었다.
신해철 부인인 윤원희 씨는 “음악대장의 인상적인 무대에 감동했고, 그의 복면가왕 무대 덕분에 시청자가 남편의 작품을 다시 한번 접하게 된 것 같아 좋았다”며 음원 출시 소감을 밝혔다.
가수 신해철의 사망 사고가 의료과실이었다고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이 그 당시 결론 내렸다지만, 어떻든 죽음이란 블랙홀에 빠져들어 간 고인의 노래가 되살아난 게 아닌가.
“하나의 검은 구멍에 털 한 오라기도 없다.”
이는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로 ‘black hole’이란 천문학 용어를 일반에게 널리 소개한 존 아치볼드 휠러(John Archibald Wheeler 1911-2008)의 말이다.
이 ‘black hole’이란 과학이 마술 부리듯 조작해낸 가장 가공할 악마 같은 존재로 물리학자, 특히 천체물리학자들이 평생토록 붙들고 씨름하듯 싸워온 괴물 중의 괴물이다. 밑도 끝도 없이 깊고 밀도가 치밀해 이 우주의 함정에 한 번 빠지면 빛이든 생각이든 아무것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 오랫동안 정설이 되어 왔었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론이 몇 년 전 제기되었다. 2016년 6월 6일자 ‘물리학 평론지(Physical Review Letters)에 발표한 논문에서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2018)과 그의 두 동료 천체물리학자인 미국 하버드 대학의 앤드루 스트로밍거(Andrew Stronminger, 1955 - ) 그리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맬컴 페리(Malcom J. Perry, 1951 - )는 이 ‘black hole’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단서를 찾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가진 인터뷰에서 하는 호킹 박사의 말을 좀 들어보자.
“우리가 누구인지는 과거가 말해준다. 과거가 없다면 우리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무엇이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중력은 우리를 땅에 붙잡아 두나 난 비행기를 타고 여기 뉴욕까지 왔다. 난 내 목소리를 잃었지만 목소리 인조 합성 재생기 하나로 말할 수가 있다. 이런 한계를 우리가 어떻게 초월할 수 있을까? 우리 정신과 기계로 가능하다.”
“It’s the past that tells us who we are. Without it we lose our identity. What make human unique? Gravity keeps us down, but I flew here on an airplane. I lost my voice, but I can speak through a voice synthesizer. How do we tran-scend these limits? With our minds and our machines.”
옳거니, 비록 우리 모두 각자가 조만간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고사(事故死)든 자연사(自然死)든 죽음이란 ‘black hole’에 빠져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 같지만 꼭 그렇지가 않은 것이리라.
자식이란 육체적인 씨가 되었든 아니면 사상이란 정신적인 씨가 되었든 또는 음악과 글과 그림이란 예술적 씨가 되었든 ‘big bang’으로 ‘black holes’에 뿌려진 씨가 제각기 소우주(micro-cosmos)로 열매 맺어 이 모든 소우주들이 대우주(macro-cosmos) 코스모스바다(The Sea of Cosmos)를 이루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니 우린 모두 하나같이 하늘과 땅이, 음(陰)과 양(陽)이, 하나로 합일해서 피어난 코스모스로 하늘하늘 하늘에서 노래하는 ‘복면가왕’의 ‘음악대장’이어라.
1970년대 젊은 시절 읽고 기억에 남는 글 하나가 있다. 한국어로도 번역 소개되어 잘 알려진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의 자서전 서문 ‘뭘 위해 내가 살아왔나 (What I Have Lived For)’에 나오는 말이다.
“세 가지 단순하나 압도적으로 강렬한 열정이 내 삶을 지배해 왔다. 사랑과 지식과 인류가 겪는 고통에 대한 견디기 힘든 연민의 정이다.”
“Three passions, simple but overwhelmingly strong, have governed my life: the longing for love, the search for knowledge, and unbearable pity for the suffering of mankind.”
여기서 그가 말하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고, 지식이란 진리 탐구이며, 연민이란 인류애를 뜻한다. 이는 우리 모두의 가장 중요한 일 아닌가. 관심 있는 독자들을 위해 그 영문 서문 전문을 인용해보리라.
“Three passions, simple but overwhelmingly strong, have governed my life: the longing for love, the search for knowledge, and unbearable pity for the suffering of man- kind. These passions, like great winds, have blown me hither and thither, in a wayward course, over a great ocean of anguish, reaching to the very verge of despair.
I have sought love, first, because it brings ecstasy – ecstasy so great that I would often have sacrificed all the rest of life for a few hours of this joy. I have sought it, next, because it relieves loneliness—that terrible loneliness in which one
shivering consciousness looks over the rim of the world into the cold unfathomable lifeless abyss. I have sought it final- ly, because in the union of love I have seen, in a mystic miniature, the prefiguring vision of the heaven that saints and poets have imagined. This is what I sought, and though it might seem too good for human life, this is what—at last—I have found.
With equal passion I have sought knowledge. I have wished to understand the hearts of men. I have wished to know why the stars shine. And I have tried to apprehend the Pythagorean power by which number holds sway above the flux. A little of this, but not much, I have achieved.
Love and knowledge, so far as they were possible, led upward toward the heavens. But always pity brought me back to earth. Echoes of cries of pain reverberate in my heart. Children in famine, victims tortured by oppressors, helpless old people a burden to their sons, and the whole world of loneliness, poverty, and pain make a mockery of what human life should be. I long to alleviate this evil, but I cannot, and I too suffer.
This has been my life. I have found it worth living, and would gladly live it again if the chance were offered me.”
그러니 생전에 그는 이런 말도 했으리라.
“그 어떤 신중함보다 참된 행복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어쩜 사랑에 신중함이다.”
“Of all forms of caution, caution in love is perhaps the most fateful to true happiness.”
우리 16대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한 말을 음미해보자.
“어떤 여인이 나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정한다면, 나는 전력을 다해 그 여인을 행복하고 만족하게 해주리라. 이렇게 하는데 실패한다면 이보다 더 날 비참하게 하는 일은 없으리라.”
“Whatever woman may cast her lot with mine, should any ever do so, it is my intention to do all in my power to make her happy and contended; and there is nothing I can imagine that would make me more unhappy than to fail in the effort.”
우리 김구(金九 1876-1949) 선생님의 말씀도 되새겨보리라.
대붕역풍비 생어역수영(大鵬逆風飛 生魚逆水泳)
“커다란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헤엄친다. 사랑의 문화와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더불어 인류 전체가 의좋고 즐겁게 살도록 하자.
네 인생의 발전을 원하거든 너 자신의 과거를 엄하게 스스로 비판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덕을 쌓고 네 앞날을 개척할지어다.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져야 땅 위의 3.8선도 무너질 수 있다.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으로도 충분히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인류가 불행해지는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 하고, 자비가 부족하며, 사랑이 부족한 까닭이다.
개인의 자유를 주창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저마다 자기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한 그런 자유가 아니라,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살게 하는 자유이어야 한다.
또한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이어야 한다. 우리가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보람을 삼는 사람들이다.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들인 것이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든 일은 내가 앞서 행하니 그것은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이는 사랑하는 자가 잘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이 추구했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그런 것이다.”
앞에 인용한 러셀의 ‘뭘 위해 내가 살아왔나’를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 아닌가. 우린 모두 하나같이 사랑의 구도자라면 말이어라.
러셀도 링컨도 김구도 지구별에 앞서 다녀간 코스미안들로서 뒤에 오는 모든 코스미안들의 사표(師表)가 되었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