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14화 먹거리
한국의 식량 자급 자족율은 24%이고 쌀은 95%라 합니다. 쌀을 빼면 자급율은 겨우 3%이니 식량부족국가이지요. 우리나라는 산악국가로 분류될 만큼 농토가 부족합니다. 쌀 부족 소리가 없어진 것이 통일벼 재배 이후이지 밀가루 분식, 잡곡 혼식 장려가 불과 몇십 년 전 이야기입니다. 요즘도 이런데 식량을 외국에서 수입할 수 없었던 예전에는 어떠했겠습니까.
세계 역사로 볼 때 식량이 남아 돌아간 역사는 없습니다. 서양인들이 고기를 주식으로 삼은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그전에는 밀가루와 감자가 주식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쌀은 귀한 식재료였습니다. 고구려의 근거지가 만주벌판일 때 그들의 주식은 조와 수수이었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쌀이 전혀 생산되지 못했지요. 그러다가 장수왕이 남진 정책으로 평양을 점령한 이후에 쌀을 먹게 되었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합니다. 쌀에 들어있는 양질의 단백질 때문이지요. 조선조 중기 이후 소빙하기 때문에 흉년이 여러 차례 들어 끔찍한 일이 많이 벌어졌지만, 모내기로 해서 이모작이 가능했기에 콩이나 보리 등 잡곡으로 대체했다고 합니다. 쌀농사가 안 되면 거기에 메밀을 뿌려 먹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쌀보다 콩, 수수 등이 더 값이 비싸지만, 그 당시는 쌀이 훨씬 귀한 곡식이었습니다. 어쨌든 심한 흉년이 들지 않으면 그런대로 배는 곯지 않은 듯합니다. 표류했다가 일본으로 돌아간 어부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이 가난한 이유가 밥을 많이 먹어서라는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눈으로 볼 때 과식한다 할 정도로 많이 먹은 모양입니다. 잡곡밥에 김치 그리고 된장국만 있으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요 반찬인 김치는 어떠했을까요? 예전에는 반찬으로 무와 미나리를 많이 먹었다고 합니다. 미나리는 무쳐서 먹고 무는 소금에 절여 짠지로 해서 먹었는데 중국을 통해 배추가 들어오자 오이와 함께 토막을 쳐서 고춧가루로 양념해서 버무려 먹었다고 합니다. 고추는 임진왜란 때 죽은 일본군 시체의 버선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매서운 조선의 추위에 동상에 걸리지 않게 넣어둔 것을 향신료로 바꾼 것이지요. 강원도 산골에서는 양념으로 소금을 썼는데 소금장사가 잘 오지 않자 고추를 소금 대체용으로 쓰다가 전국적으로 퍼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통배추 김치도 역사가 길지 않습니다. 구한말 원세개를 따라 들어온 청국 상인들이 산동성의 배추를 왕십리에서 처음 재배한 것을 개량해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된장국은 토장국이라고도 하는데 콩을 발효한 청국장과 맥을 같이 하지요. 청국장의 기원도 병자호란 때 후금의 군인들이 들여와서 먹은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전에 청국장을 먹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도 오래된 것 같습니다. 쌀과 잡곡을 보조하는 식품으로는 감자와 고구마가 있습니다. 감자는 중기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것 같고 고구마는 조엄이 일본에서 수입해 보급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황식품이라고 하지만 영양가가 높은 감자와 고구마는 흉년에 대비한 식품에서 일상식품으로 바뀌었습니다. 토마토, 참외, 오이, 포도 등도 중국을 통해 들어온 외래산으로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했고 밤이나 대추, 호도를 따거나 산이나 들판의 나물을 양념해서 먹는 방법으로 식재료의 범위를 넓혔습니다.
먹으면 맛있고 짧은 시간에 많은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소나 돼지고기의 고기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소는 농사를 지을 때 곡 필요한 가축이기에 도살을 금했고 돼지는 먹는 사료가 인간과 같은 것이기에 함부로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불교의 영향으로 살생을 금지해서 고려 때는 원나라로 짐승을 도살하는 기술을 배우러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생선도 지금처럼 멀리 나가서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배를 띄워 낚시를 하거나 육지와 가까운 곳에 그물을 치고 여러 사람이 잡아당기는 방법으로 근해의 고기를 잡았기에 수확이 적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조상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먹거리 개발에 여러 방도로 힘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