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반납할 것이 많습니다. 잠깐씩 이용하는 필기구, 식기, 때론 옆자리의 의자, 그리고 만료된 각종 면허증과 자격증, 나아가 렌터카, 전셋집 등도 그 대상이 될 겁니다. 필자의 경우엔 자주 이용하는 도서관의 책이 그 주된 대상이 될 것 같고요…. 좀 더 근원적으로는 우리의 육신도 반납의 대상이 되겠지요.
얼마 전 백전노장의 한 장군이 생을 마감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백수(白壽)를 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대단한 일입니다. 장군은 그동안 일제 침략기를 거치고, 한국 동란 중에는 전설적 무용(武勇)을 펼쳤으며, 그 이후 폐허를 딛고 일어선 한국의 발전상을 두루 지켜보고 삶을 마감했습니다. 이승을 떠나며 아마도 신에게 “백 년의 삶을 넉넉히 잘 썼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삶의 길이는 각각 달라서, 어떤 이는 이십 대에, 어떤 사람은 팔십 대에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교통사고나 어떤 특별한 사인이 아니라면 어지간해선 불혹(不惑)이나 지천명(知天命)을 넘길 것입니다. 집의 경우에는 사람보다도 훨씬 긴 세월을 견디겠지요.
요즘 건물들은 건축기술이나 재료가 발전했으니 좀 더 장구한 세월을 버텨갈 것입니다. 얼마 전 옆집에 새 주인이 이사 왔는데 또 집수리합니다. 왠지 모르지만, 그 집은 대략 3년 정도만 되면 주인이 뜨내기처럼 바뀌곤 합니다. 새 주인이 올 때마다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집을 뜯어고치고 수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유한의 삶을 사는 인간이 집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방법이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패션처럼 시류에 떠밀려가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사람은 ‘집’ 하면 아파트가 대세이니 꼭 아파트를 소유해야 한다든가, 어느 지역에 부동산을 소유해야 한다든가, 차는 꼭 있어야 한다든가…. 뭐, 이런 생각들이 많은 사람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 생각이 정말 일률적으로 돼가는 것 아닐까요.
경제적 도약기에 한국의 사회 분위기가 한때 일하지 않는 자를 악마 취급하며 사회에서 배척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베짱이’로 먹고 노는 것으로 인식되어 박해와 박봉에 시달리기도 했었을 겁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그 시절은 얼마나 숨 막히는 사회였겠습니까. 크리스타 볼프Christa Wolf는 말합니다. “열심히 살 의무만을 남기고 나태해질 권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 사회는 악하다. 오직 하나의 선택지로 겁박하는 사회에 저주 있을지니.”
우리가 거쳐 온 시간. 먹고 살기 위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남보다 앞서기 위해 1등만을 향해 달려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1등이 되기 위해서, 상위권으로의 도약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었고…. 꼴등이 보이지 않던 시절, 꼴등은 사람이 아니던 시절을 지나오지 않았습니까.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는 그의 글에서 꼴찌를 한유(閑遊)의 차원에서 조명합니다. “학교에서 밑바닥을 치는 아이들, 교실에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특징이나 개성, 존재감을 가지지 못하는 열등한 아이들. 그들은 교실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배제되어 있지도 않다. 그냥 주목을 받지 않고 의미를 두지 않는 존재로서 그곳에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때때로 바라는 상태이다.”라고 말입니다
한 방향으로의 똑같은 삶을 강요하는 것은 폐해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삶을 어느 정도 정돈해서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즉, 삶을 정제된 형태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인데, 이것은 삶이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힘을 얻는 것 또한 “한번 주어진 삶이 내세의 부활을 통해 이어진다”라고 보기 때문일 겁니다. 만일 삶이 무한하다거나, 반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돈, 시간, 기타 자원처럼 흥청망청 써버리는 경우도 허다할 테지요. 그리고 인간은 한정된 삶, 시간을 살아가기 때문에 삶 전체에 무한정 에너지를 집중할 수 없다면, 나이가 들면서는 ‘선택과 집중’을, 그리고 ‘좋아하고 의미 있는 것’에 시간과 열정을 투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획일적 가치관과 시류에 몸과 마음이 휩쓸려 가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자의적이건, 타의건 그런 조류에 휩쓸려 탈출할 수 없는 곳이라면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덕적, 사회적 기준에 맞으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얼마나 할 수 있는가, 또 그 바탕을 얼마나 폭넓게 열어주고, 그럼으로써 성취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좋은 사회의 요건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돌아보면 ‘삶은 한 번뿐’이라는 단순 명제야말로 삶을 온전하게 해주는 역설적 테제이며, 삶의 강력한 추동력이 아닐는지요. 생각할수록 신의 섭리는 심원(深遠)합니다.
빌려 쓴 육체를 반납할 때, 각자의 명분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 가정해봤습니다. 〔교통사고로 떠나는 30대의 변: “아직 할 일도 많고, 인생의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데… 억울합니다.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 병사로 떠나는 50대의 변: “그럭저럭 반평생 살았지만... 좀 더 잘살 수 있는데, 매우 아쉽습니다.” / 지병으로 떠나는 90대: “늙고 쇠하여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지요. 이만하면 원 없이 잘 썼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반납합니다!”〕
빌려 쓴 육신, 빠르든 늦든 돌려줄 수밖에 없습니다. 집과 돈 그리고 아끼던 차와 보물. 그런 것 다 차지하고, 누구나 예외 없이 써온 몸을 반납할 때가 옵니다. 몸과 함께 정신과 이성(理性)도 자동 반납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썼습니다,
이제 반납하겠습니다.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