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박사 *
역사의 수레바퀴의 신비 (The Mystery of the Vehicle of History)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후부터 역사는 지금까지 흘러왔고 앞으로도 브레이크가 없는 수레바퀴(vehicle)와 같이 종말까지 흘러갈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역사 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타고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불행이도 역사의 수례바퀴에 치어서 치명상을 입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다. 앨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희생된 대표적인 분이라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께서 자신이 구세주(Christ/the Savior)로서 역사의 종말을 앞당기기 위해 역사의 수례바퀴를 붙잡고 역으로 돌리려고 안간 힘을 쓰시다가 육체의 힘이 부처서 그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놓쳐버려, 돌고 있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어 그 몸이 산산조각으로 찢어졌는데, 이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라고 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초 종말론적 사건(hyper-eschatological event)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잘 못된 역사의식으로 오늘날까지 잘 못된 신학으로 유도하는 계기가 되어 순수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변질되어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신학에 대한 비평을 하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역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하여 영원히 사는 길, 즉 영생의 길(the way of eternal life)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 속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왜 일장춘몽이라는 짧다면 짧은 세월에 그렇게도 아귀다툼을 하고 악을 쓰며 살려고 할까? 성경의 아삽도 인생사를 꿈꾸는 것 같다고 했는데 말이다. 요사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도 악을 쓰며 정치하고, 미투하고, 헛된 욕망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난 후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신정통주의신학자(neo-orthodox theologian) 바르트(Karl Barth)는 초 역사(geschichte)와 역사(historie)라는 두 개의 차원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사건들은 초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연동되는 실존주의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일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나 부활사건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한다.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체적이며 역사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첫째로 초역사이지만 또한 내적 세계의 어떤 것이라는 의미에서만 사실이다”(To be sure, the resurrection is physical and historical, but this is true only in the sense that, though it is primarily Geschichte, it is also an innerworldly something). 이러한 역사의식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므로 실존주의 문학자 사르트(Jean Paul Sartre)나 까뮈(Albert Camus)와 18세기 영국 시인들(poets)들과 같이 형이상학 세계(metaphysical world)와 형이하학 세계(physical world), 즉 영적 세계(spiritual world)와 육적 세계(physical world)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육욕적 사랑(carnal love)과 정신적 사랑(Platonic love)라는 이중적 사랑을 노래하며 사람들을 두 개의 사랑의 세계(two worlds of love)로 숨 가쁘게 그네를 타며 왔다 갔다 하여 여행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 행복한 삶보다는 오히려 피곤하고 슬픈 사연들의 드라마들이 연출되곤 한다.
신학자 중에 구원사 학파(Heilgeschichte school)에 속한 쿨만(Oscar Culmann)은 “역사 중에 일반역사가 외연이라면, 기독교의 역사 즉 그리스도의 역사인 구원의 역사가 역사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라고 주장했다. 이는 마치 연필의 외연 즉 외곽이 일반역사라면, 그 속의 심(lead)이 그리스도의 역사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의 중심은 일반사의 사건들이 아니라 그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의 사건이 중심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사가 그리스도의 역사로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사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구원의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뜻이다.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엘리어트(T. S. Eliot)에 의하면, 그의 희곡(Play)인 “성당 안의 살해”(Murder in Cathedral)에서 역사의 수례바퀴의 외연을 양적 시간의 역사로 헤아릴 수 있지만,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질적 시간의 역사로 헤아리기 어려운 상황으로 진전되어 간다고 한다. 마지막 가장 깊은 속의 중심에 도달하게 되면 시간의 운동이 정지되는 “정적의 지점”(Still Point)에 이르는데, 바로 이 지점이 영생이 있는 영원(Aeon) 즉 하나님(God)에게로 통한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의미심장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이 통로야말로 생명의 통로가 아닌가?
어제 한국 용인에 있는 대형 물류센터 지하 4층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5명의 사망자와 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전한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오지 못한 원인이 바로 밖으로 나오는 통로를 찾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숨이 콱콱 막히다 못해 질식할 지경에 숨통을 열어줄 통로가 없어서였다고 한다. 사실, 조금만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마치 수없이 많은 죄악의 독가스들로 차있는 밀폐된 공간이다.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결국은 질식사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선한 생명의 공기가 충만한 세계, 즉 영원세계로 통하는 통로를 이미 이천년 전에 만들어 주셨다. 아니 계시론적으로 보면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언약으로 이미 야속해주셨다(창 3:15). 그 통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의 세계로 통하는 통로로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에 계시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by grace)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through) 구원에 이르게 된다(엡 2:8).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담대하게 증거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 숨통이 막히는 출구 없는(without exit) 이 세상에서 살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출구밖에는 없다는 진리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영생을 얻으리라”(Believe in the Lord Jesus, and you will be saved—you and your household) (행 16:31). Amen, Halleluj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