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강의 인문으로 바라보는 세상] 풀베기

신연강



풀베기는 이율배반적이다. 자라는 생명을 단절시키지만 다가올 생명을 위한다는 점에서 풀베기는 이율배반적 행위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만, 질서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풀베기는 모순적이나 합리적이다. 하늘 높이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한낮의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들판. 군살 없는 흑갈색의 탄탄한 근육, 그리고 그 근육을 담보한 팔이 예초기를 율동적으로 흔들면, 송이 맺힌 땀 방물이 일직선으로 낙하한다.

 

하는 소리에 솟구쳐 날아가는 것은 한 떼의 벌이 아닌 잘게 썰린 잔디 잎. 회전 모터가 돌 때마다 곡선을 그리며 싱그런 잎들이 흩어진다. 때론 놀란 벌들이 솟구쳐 올라 혼비백산 흩어지기도 한다.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에 탄탄한 근육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때마다 아우성치는 초목. 귀담아듣는 이 없어도 풀벌레는 팔짝팔짝 뛰며 항의한다.

 

풀베기는 해방의 몸짓. 몸과 정신을 얽매었던 사슬을 끊고 대지의 자유를 부른다. 푸른 잔디가 담긴 그림에는 하늘과 나무와 돌이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따금 찾아오는 소나기는 예의를 갖추지 못한 손님. 과격함으로 정평이 난 소나기가 한참을 퍼붓고 나면, 대기는 폐부에 깊숙이 들어와 낮고 그윽하게 깔리지만 반가운 흙 내음은 영혼에 깊이 침착된다. 흙이 가져온 변화의 촉감을 느낄 새도 없이 소나기는 세상을 지배하며, 사나운 기운이 다할 때까지 모든 것을 가두어 자유를 유보한다.

 

구름 걷힌 하늘 아래에는 해방의 전사가 있다. 풀베기의 대표 도구인 낫. 한 방향으로 굽어진 ㄱ자 모습을 볼 때마다 그 투철한 신념을 느끼게 된다. 이 도구는 풀베기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녹이 슬고 날이 무뎌 내던져지기까지 주어진 일을 무던하게 해가는 주인의 충복. 움직일 때마다 마주하는 크고 작은 저항을 과감히 잠재우는 불굴의 전사이다.

 

낫은 인류를 위해 불평 없이 성실하게 봉사해왔다. 한여름 농부의 땀을 듬뿍 먹으며 무질서를 정복하고 질서를 부여한다. 대지에 찬바람이 일면 한해의 결실을 모아 주인에게 희사하고 휴식을 준비한다. 때론 민초의 서러움과 항변을 위해 몸에 피를 묻힌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의리의 존재로서 자신의 몸을 지탱해준 나무와의 우정을 간직하고, 장구한 세월을 견뎌온 은근과 끈기의 상징이다.

 

이율배반적 삶을 살아온 낫. 곡진한 삶 가운데 의지를 불태웠고, 사심 없이 거두어 아낌없이 되돌리며 살아온 가운데, 오늘 다시 주인의 명령을 기다린다. 풀베기라는 숭고한 명령을.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박사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8.22 10:35 수정 2020.08.22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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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