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내 삶의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내놓으리라’

이태상

 

2020824일자 한국일보 뉴욕판 오피니언 페이지 칼럼 동양과 서양의 관점에서 뉴저지 원적사 성향 스님은 이렇게 동양과 서양의 다른 관점을 지적한다.

 

동양인은 모든 물체와 상황을 상호작용의 결과로 본다서양인은 모든 물체를 상호작용의 결과로 보지 않으며 존재한다는 고정적인 의미로 생각한다.”

 

그러나 근년에 와선 많은 서양의 석학(碩學)들이 동양적 관점으로 시선을 돌려왔나 하면 많은 동양인들, 특히 한국인들이 서구의 물질문명에 세뇌되어 서양의 관점을 숭상, 무조건 모방해 온 것 같다. 비근한 예로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의과대학의 심리학자 스티븐 버글라스(Steven Berglas, 1950 - ) 박사는 십여 년 동안 연구 조사해 본 결과 미국 사회 각계각층 에서 크게 성공했다가 그 성공 때문에 실패, 패망한 사람들의 공통되는 네 가지 약점을 발견했다며, 이를 발표했다.

 

첫째로 자만과 교만심

둘째로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거리감 내지 격리감 내지 괴리감(乖離感)

셋째로 상습적인 투기성 도박심리

넷째로 그칠 줄 모르는 바람기

 

이와 같은 성공병의 치유책으로 인디언이 되지, 추장이 되지 말 것을 그는 권한다. ‘독불장군(獨不將軍)’이 되지 말고 모든 이웃과 사회 전체에 기여하고 이바지하는 일원이 되라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착취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이럴 때 우리는 실로 가장 건전하고 행복한 성공의 보람을 느끼고 실패를 모르는 성공의 열매를 모든 이웃과 나누는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의 법률가요 웅변가요 정치지도자였던 로버트 잉거솔(Robert G. Ingersoll 1833-1899) 같이 우리도 이렇게 믿고 살아가야 하리라.

 

내 신조는 다음과 같다

행복이 유일한 선()이다

행복해할 곳은 내가 있는

바로 이 자리 이 장소이고

행복해할 때는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이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다른 사람 행복케 하는 것

Happiness is the only good.

The time to be happy is now.

The place to be happy is here.

The way to be happy is to make others so”

 

그리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처럼 우리도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Try not to become a man of SUCCESS, but try to become a man of VALUE” 하리라.

 

또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으리라. 랍비(Rabbi)라 불리는 유대의 율법박사 모세 리브 선생이 말하기를,

 

인간이 타고 난 어떤 자질이나 능력도 아무 목적이나 의미 없는 것이 없다. 심지어 가장 비열하고 못된 성품까지도. 예를 들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조차 그 어떤 선행(善行)을 통해 승화시킬 수 있다. 이를테면 누가 네게 도움을 청할 때 너는 신앙이 돈독하고 경건한 말투로 그 사람에게 믿음을 갖고 네 모든 어려움을 신에게 맡기라하면서 그를 따돌리지 말고, 마치 신이 없는 것처럼,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딱 한 사람, 곧 너 자신밖에 없는 것같이 행동하라.”

 

이를 우리말 한 마디로 줄이자면 개똥도 쓸 데가 있다가 되리라. 몇 년 전 내 아내가 수십 년 간호사로 근무했던 스태튼 아일랜드 성() 빈센트(Saint Vincent) 병원 산부인과 대기실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벽에 걸려있는 것을 나는 유심히 관찰했다.

 

-하나의 산 설교

 

어느 날이고

설교를 듣기보다

보기를 난 원합니다.

내 갈 길을

가르쳐 주기보다

나와 함께 동행해 주는

당신이 보여주면

나도 곧 어떻게 할지

배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당신의 손 움직임

내가 잘 주의 깊게 보고

하지만 당신의 혀놀림은

너무 빨라 따라갈 수 없어요.

당신이 말하는 것들이 모두다

매우 지혜롭고 옳은 말씀이지만

나는 당신의 몸가짐을 잘 보고서

생생한 교훈을 얻고자 한답니다.

비록 내가 당신을 잘 모르고

당신 말씀 다 이해 못한다 해도

당신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오해란 있을 수 없을 테니까요.

 

이상과 같은 글이 다른 데도 아닌 병원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우리 말에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이 있지만, 약 중에도 마약 같은 것은 병 중의 병, 만성 고질병을 가져오는 중독성이 있지 않은가.

 

예를 들자면 일주일에 한두 번 천주교 성당이다, 개신교 교회다, 회교 사원이다, 유대교 회당이다 하는 곳에 모여 십자가성모 마리아()이니 구세주 예수의 조각 등을 이용, 실행 대신 구두선(口頭禪) 같은 설교나 듣고, 자기 세뇌, 자기 최면에 걸려, 지난 한 주 동안에 사람으로서 못 할 짓 한 것에 대한 자책감 또는 수치심 내지는 죄책감을 쉽사리 아주 간단하고 편리하게도 예수의 피로 깨끗이 씻어버리고 속죄(贖罪)받았다는 가볍고 개운한 마음과 기분으로 다시 지난 한 주 동안 저지른 잘못을 다음 주에 되풀이 반복하는 것 말이다.

 

우리 말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하듯이 뿌린 대로 거두고, 아이를 배고 낳는 산고(産苦)를 치른 다음에라야 옥동자 옥동녀를 볼 수 있지 않던가. 물론 상상임신이나 임신망상도 있다지만 일단 임신했다가도 다 순산(順産)하는 것 아니고, 유산(流産)이나 사산(死産)도 있을 수 있으며 심하게는 기형아(畸形兒)나 저능아(低能兒) 지진아(遲進兒)를 출산할 수도 있지 않은가.

 

세상에 공짜가 있을 수 없고 공염불(空念佛)’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 모두 타고난 생김새부터 살펴볼 일이다. 제대로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다 눈과 귀, 손과 발은 둘씩이지 만 입과 혀, 가슴과 머리는 하나씩이 아닌가. ‘수피(Sufi)’라고 불리는 신비주의 이슬람교도들의 기도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 주여!

지옥 가기 싫어 당신을 찾거든

날 지옥에 보내시고,

천당 가고 싶어 당신을 섬기거든

날 천당에 못 들게 하십시오.

하지만 아무런

사심(私心/邪心) 없이

당신께 경배하거든

당신의 아름다운

성상(聖像)

내게 보여주십시오.

 

내가 이 당신의 아름다운 성상(聖像)’을 의역(意譯/義譯)해 보자면 우리 모든 코스미안의 아름다운 우주자연 코스모스가 되리라.

 

 

O my Lord

BY RABI’A

(Translated by JANE HIRSHFIELD, 1994)

 

O my Lord,

if I worship you

from fear of hell,

burn me in hell.

 

If I worship you

from hope of Paradise,

bar me from its gates.

 

But if I worship you

for yourself alone,

grant me then

the beauty of your Face,

 

몇 년 전 일본과 한국에서 과거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저지른 만행 중에 우리나라의 종군 위안부 정신대에 관한 기록 문서가 발견 공개됨에 따라 한국인의 분노가 새삼스럽게 폭발했지만, 외국인에 의해 과거에 일어났던 일은 그렇다 하더라도 얼마 전까지도 우리나라에서 같은 동족에 의해 자행되어 온 인신납치 매매행위는 일제 만행보다 더 하다면 더 한 짓 아니었나.

 

얼마 전 신문에서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한국인의 약 50%가 종교를 갖고 있고, 그중 20%가 불교, 19%가 기독교, 그 나머지가 기타 종교인데 불교 기독교를 막론하고 신도들이 그들이 믿는 종교단체에 가장 바라는 바가 헌금이나 시주를 강요하지 말 것과 그들이 내는 돈을 좀 더 많이 불우이웃을 돕는데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들의 요망사항은 제발 좀 종파분쟁을 그만두어 달라는 것이었다. 흔히 신문지상에 각종 의연금이나 성금 기부자 명단이 대문짝만큼 크게 나고, 교회 주보에는 헌금 액수와 헌금자 명단이 찍혀 나오며 특별헌금을 한 신도나 신자를 위해서는 목사와 중이 특별기도특별 염불을 올려 준다.

 

미주 교포사회에서 떠도는 얘기로는 교회 장로감투를 쓰려면 최소한 미화로 만 달러 이상을 뇌물처럼 바쳐야 한다고 한다. 사람도 아닌 하느님이나 살아 있지도 않은 예수나 석가모니가 왜 그토록 돈이 필요하며 그토록 큰집(교회나 성당, 절 등)이 필요하단 말인가.

 

하느님이 정말 계시고 인격보다 훨씬 더 훌륭한 신격의 소유자라면 인간들이 그 어떤 장대하고 화려한 교회나 성당을 짓고, 그 어떤 경건하고 엄숙한 종교의식을 통해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인간, 그리고 동물과 식물의 탈까지 쓰고 우리 가운데 그것도 가장 낮고 천한 곳에 거()하시는 우리 자신 스스로를 왼손이 하는 일을 바른 손이 모르도록서로 힘껏 돕고 사랑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고 기뻐하시리라.

 

자고이래로 거짓말쟁이일수록 말끝마다 정말, 정말, 진짜, 진짜, 참말, 참말이라고 강조하면서, 애국애족심이라고는 콧수염 털끝만치의 그림자도 없는 해국해족자(害國害族者)들일수록 애국애족자연하며, 하느님이나 부처님 뜻(?)을 더할 수 없이 배반하고 거역하는 자들일수록 제 시꺼먼 뱃속을 채우기 위해 그 더욱 소리 높여 목청을 가다듬고 하느님과 부처님 이름을 부르며 팔아오지 않던가. 그래서 신약성서에서 예수도 당시의 학식 많고 높은 신분의 학자와 종교인들인 바리새파 교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 하고 사두개파 물질주의자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했으리라.

 

오늘날 그리고 지난 2천여 년 동안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행동하고 살아온 사람들일수록 자신을 크리스천 기독교인이라고 자칭해 오지 않았는가. 진실로 예수가 2천여 년 전 죽었다가 실제로 부활했건 안 했건 간에, 또 앞으로 정말 그 언젠가 재림하든 안 하든, 그의 영혼만이라도 살아 있다면 지난 2천여 년을 두고 계속 통곡에 통곡을 했을 일이다.

 

특히 그의 이름을 빙자(憑藉)한 정신적인 정신대(挺身隊)로 끌려나가 짓밟힌 수많은 희생양을 위해서 말이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십자군에 동원되어 온 수많은 제물과 노예들, 다시 말해 선악(善惡) 흑백(黑白)의 아전인수(我田引水)식 독선 독단적(獨善獨斷的)인 가치관의 노예들과 이러한 위선적 가치관과 선민사상(選民思想) 그리고 백인제국주의자들의 제물들을 위해서자연과 세상이 다 우리 자신의 거울이듯 문학과 예술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으리라.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oet, 1597)’을 통해 우리도 연인들이 되고, 그의 햄릿(Hamlet 1599-1601) ’은 우리를 회의와 사색에 잠겨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며, 스페인의 풍자 소설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1547-1616)돈키호테(Don Quixote, 1605)’는 현실을 무시한 과대망상증적(誇大妄想症的) 공상을 실현하려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전에 들은 얘기로 한국판 돈키호테라 할 수 있을 봉이 김선달인지가 하루는 지체 높은 양반집 마님들을 모아 놓고 밤에 영감님의 귀중한 물건을 너무 꼭 잡고 자면 손바닥에 사마귀 생긴다고 말하자 모두들 하나같이 제각기 제 손을 펴보더라고. 모름지기 이때 이 사마귀란 사랑 (), 마음 , 귀하신 몸 자였으리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다 보면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눈에 잘 띄는 손바닥에 아주 작은 하나의 상징적인 귀한 몸으로 강생(降生) 현신(現身)한다는 뜻이었겠지.

 

, 그렇다면 우리 말에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란 말이 빈말이 아니었구나! 또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일심동체의 표본이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살기냐 죽기냐(TO BE OR NOT TO BE)로 고민하고 고뇌하는 인간상(人間像)햄릿이 아닌가. 여기서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그리고 돈키호테세 유형을 짬뽕한 것 같은 예 하나 들어보리라.

 

‘20세기의 사상가로 불린 헝가리 태생의 영국 언론인 작가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 1905-1983)와 그의 부인 신티아 제프리스(Cynthia Jefferies, married 1965-1983)19833월 그들의 런던 자택에서 함께 동반자살했다. 그는 루키미아는 백혈구 과다증과 전신마비를 일으키는 파키슨 병을 앓았었다. 그의 부인 신티아는 남편 없이 혼자 살고 싶지 않아 남편과 같이 죽은 것이다. 그들은 유산 50만 파운드를 어느 영국대학 부설 심령과학 연구소 설립기금으로 써달라는 유언장을 남겼다.

 

이심전심(以心傳心) 같은 초심리적 심령현상의 과학적 연구를 하는 심령과학에 관심을 갖고 쾨슬러는 일치의 근거(The Roots of Coincidence, 1972)’우연의 도전(The Challenge of Chance: A Mass Experiment in Telepathy and its Unexpected Outcome, 1973)’이란 그의 저서에서 그는 인간의 이성(理性)과 지능(智能/知能) 밖의 영역(領域/靈域)을 탐구했다.

 

서양의 지식층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분야는 사기꾼이나 돌팔이 무당 또는 약장수들과 이들의 속임수에 빠지기 쉬운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관심사로 치지도외(置之度外)해 왔고 근년에 와서 일각에서 관심을 좀 갖기 시작했으나 아직까지는 일종의 과학적인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자칭 무신론자였던 쾨슬러는 죽음은 미지의 나라로서 만성 고질병을 앓는 사람은 고문실(拷問室)’을 통해서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미지의 나라를 향해 이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쓴 그의 유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또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경계를 넘어, 인간 개인으로서의 개성과 인격을 탈피 탈바꿈한 탈인간(脫人間)을 위한 내세(來世)에 대해 좀 겁먹은 희망을 갖고 나는 떠난다.”

 

그의 유언집행자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대학에서 심리학을 강의한 존 벨로프(John Beloff 1920-2006)의 말로는 쾨슬러가 초현실세계와 접촉을 갖는 신비스러운 경험을 하고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 개인은 없어지지만 그 사람 개인의 정신 또는 영혼은 우주정신(宇宙精神)’이나 우주혼(宇宙魂)’에 통합(統合)될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죽음의 사자(使者)가 찾아오면 그에게 무엇을 대접할까? (On the day when death will knock on thy door what wilt thou offer to him?)”

 

이와 같은 물음에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Rabindranath Tagore 1861-1941)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 삶의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내놓으리라.

(Oh, I will set before my guest the full vessel of my lifeI will never let him go with empty hands. All the sweet vintage of all my autumn days and summer nights, all the earnings and gleanings of my busy life will I place before him at the close of my days when death will knock at my door.)”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8.26 10:00 수정 2020.08.26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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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