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에 초판이 나온 후 커다란 미국사회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온 작품, 비평가들은 미국의 3대 전통사상 사상이 녹아있다는 찬사를 한 반면 보수주의자나 자본가들은 사회질서를 무너뜨릴 불온서적이라고 비판을 가했다. 1939년에 3년째 판매 1위를 차지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치고 베스트셀러에 오른 대작 '분노의 포도'를 어떤 주제를 갖고 있을지....
1929년 미국은 경제 대공황으로 사회적인 분위기가 암울했다. 길거리엔 실업자들로 즐비했고, 은행과 공장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인간의 삶은 피폐해졌다. ‘분노의 포도’는 바로 이 시절을 살았던 '굶주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빈부의 격차는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한 조각의 빵이 없어 굶는 사람들 위에 1차 세계대전 후 엄청난 부를 축적한 소수의 미국인이 있었다. 미국의 경제 대공황은 이런 시기에 몰아쳤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1930년대 미국 경제공황의 어려움 속에서 한 농부 일가가 겪는 인생유전을 그린 소설이다.
톰 조드는 실수로 사람을 죽여 4년을 복역한 뒤 가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1932년부터 미국 중서부의 광활한 평원을 휩쓸었던 더스트 볼(Dust Bowl) 먼지 바람으로 농사를 망친 소작인 톰 일가는 때맞춰 불어온 경제대공황으로 가난에 찌들게 되고 오직 캘리포니아로 오라는 광고지 한 장에 희망을 걸고 한 대 존경받는 목사였던 케이시와 함께 고향 오클라호마를 떠난다. 조그만 중고트럭 한 대에 12명의 가족이 모두 타고 66번 도로를 따라 일자리가 넘친다는 오렌지와 포도가 넘쳐난다는 낙원의 땅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가는 도중 조부모는 사망하고, 맏아들은 도망쳤다, 여동생의 어린 남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막상 캘리포니아에 도착해보니 기대와는 딴판, 일거리도 적고 임금도 낮은 데다가 농장주들은 낮은 임금으로 배고픈 하층민들을 갈취하고 있었다.
후버빌에서 짐을 푼 그들은 일자리를 구하려 하나, 광고를 보고 서부로 몰려온 30만의 실직자가 들끓고 있는 상황, 그날 저녁 노동자를 모집하러 온 정부의 고용인과 그곳에 사는 보안관 플로이드와의 불합리한 폭행에 톰이 반발하여 개입하나 케이시가 자청하여 책임을 떠안고 끌려가 톰은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날 밤 후버 빌을 떠난 그들은 위드패치 캠프에 도착하여 그곳에 수용되었다. 이곳은 자치구역으로서 이상적일 만큼 모든 시설이 잘되어 있었다. 위드패치 캠프에 온 지 한 달이 되도록 톰 가족은 일자리를 얻지 못하여 고향을 떠날 때 챙겨온 여비가 떨어지자 별수 없이 다른 희망을 품고 북쪽으로 갔으며 도중에 복숭아 따는 일자리를 얻어 그곳에서 머문다. 임금은 형편없이 낮았고 물가는 굉장히 높았다.
그날 밤 산책을 나간 톰은 골짜기에서 출옥한 케이시와 만났다. 케이시는 출옥한 뒤 임금인하에 반대하는 저항세력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케이시는 색출대의 습격을 받아 숨을 거뒀다. 톰은 홧김에 케이시를 죽인 살인자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가족이 있는곳으로 도망,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린다. 조드 가족은 톰을 트럭에 숨기고 야간을 틈타 그곳을 빠져나간다. 도망친 곳에서 가족들은 목화 따는 일을 얻고 톰은 지역 하수관에 몸을 숨긴다. 톰의 가족은 화차 바퀴를 떼어 만든 조잡한 캠프 한 칸을 얻어 집으로 삼고 가족 모두가 일해서 4달러를 벌면서 겨우겨우 생활을 유지한다. 그러던 어느 날 루시가 아이들과 싸우다가 톰과 케이시의 이야기를 자랑했다. 어머니는 이에 두려움을 느끼고 재빨리 톰에게 알리러 갔다. 오랜 시간을 하수구에서 보낸 톰은 맥알레스터에서 출옥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는 그림자처럼 보이지 않고 그루터기 같이 땅에 딱 붙어 앉은 채 어머니와 대화를 하고 돈을 받아 도망을 간다.
앨은 이웃집 웨인라이트 씨의 딸과 약혼하고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오겠다는 목표를 이루었다. 그 때 무서운 홍수가 지역을 휩쓸었으며 아버지와 존 백부는 개울에 제방을 쌓지만 실패했다. 비가 몹시도 내리던 날 어린 임산부인 큰 딸은 죽은 아이를 낳는다. 슬픔에 잠길 여유도 없이 강물은 범람하고 남은 가족들은 세상을 삼킬 듯이 내리는 비를 피해 헛간으로 피하는데 비를 피하는 움막 안에는 한 중년 남성이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었다, 이때 아이를 막 사산한 큰 딸은 중년 남성의 머리를 안고 부푼 젖을 물린다.
죽은 아이를 낳아 기력을 잃고 슬픔에 젖은 산모가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젖을 주는 이 행위야 말로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애, 휴머니즘의 정수가 아니겠는가! 스타인백이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을 찬미하고 생명의 유대를 강조한 한 이 장면을 통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왜 이 순간 분노의 포도를 다시 읽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명 장면이다. 이는 1930년대 미국의 문제도 현대 대한민국의 문제도 자본주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는 수단일뿐이며, 자본주의 하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현대 사회의 온갖 문제는 단순히 시스템을 바꿔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마주하고 살고 있는 사회 안에서 서로 부대끼고 살아가는 사람끼리 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도 필요하지만 결국 서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적 인류로서 인간적인 유대가 필요한 것이고 서로 돕고 이해하고 양보하고 사랑하는 함께 공생하는 인간적인 유대가 필요하다고 스타인벡은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민병식]
인향문단 수석 작가
대한시문학협회 경기지회장
문학산책 공모전 시 부문 최우수상
강건 문화뉴스 최고 작가상
詩詩한 남자 문학상 수필 부문 최우수상
2020 코스미안상 우수상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