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구 칼럼] 중, 제 머리 깎다

문경구



요즘처럼 세상이 이렇게 작고 협소한 공간으로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마치 지구조차도 펴놓은 작은 텐트 속에 갇혀서 숨쉬기조차 버거울 듯 보인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 바깥세상과 단절을 원하는 장막으로 덮여 있다. 그 공간 속에 코로나라고 하는 병을 지닌 유령의 환자가 내뱉은 공기를 억지로 들이마시며 살아가야 하는 느낌이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행성 맑은 별의 나라로 도망치고 싶다. 아침 커피 한 잔이면 말끔한 하루를 열던 그런 순수하고 그저 평범하기만 하던 지구 속 나의 날이 절대 아닌 거다. 굳게 믿고 기다렸던 봄의 날들 중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바이러스성 호흡기병은 그 봄을 그렇게 짓밟고 지나 곱디고운 꽃이 피어대는 여름을 속절없이 뛰어넘으며 더 거세게 세상을 옥죄고 있다.

 

처음에는 스쳐 지나는 소문처럼 잠시 성가심을 이겨내기만 하면 되는 호흡기성 감기로 시원찮게 여겼다. 그런데 대놓고 코로나라고 하는 역병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방송 매체만큼 빠르게 확산하여 갔다. 보일 수 없는 바이러스는 전파만큼 더 빠르게 퍼지듯 역병이라는 무거운 병명이 되어 창문 안으로 들어서려 하니 가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가슴을 모두 잠가버리게 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가을 손님인 소슬바람이 지난해 두고 떠났던 약속을 잊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찾아온다 해도 안면을 완전 몰수하고 안하무인으로 밀어대는 코로나 역병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모든 계절의 윤회조차 풍비박산을 내고 말 생각처럼 역병은 그 속내를 숨기고 조용히 찾아와 이미 세상 사람들 모두의 몸을 점령하고 있다. 당장에 증상이 밝혀지지 않는다고 무증상자들로 보고 안심하면 잘못이다. 이미 모두에게 확진되어 있다.

 

조용히 속내를 감추고 기다리다 호시탐탐 감기의 차림으로 위장하여 공격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혼란스러운 역병을 지켜내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말끔히 단도리 하고 내다보는 세상도 단숨에 이겨낼 수 없는 공포 속에 말려든다. 형틀에 묶여서 주리를 틀리고 입에 자갈을 물리던 구시대 속, 죄인 다루는 방식과 한치도 다름이 없다.

 

마스크를 쓰라는 말보다 자갈을 물리라는 말이 최선책인 것 같다. 책상 위에 놓인 둥근 지구본이 그 방향을 잃었고 사람들의 일상이 거꾸로 흘러가고 있다. 나도 오늘은 사극 속에서 역병으로 고생하던 옛 조상들을 만나 그 시절 사람들의 지혜를 얻고 싶다. 오늘날 같은 첨단의료기술이 없었던 그 시절엔 사람이 아프면 침을 맞고 뜸을 뜨고 한약을 먹는 것이 최대의 의술 자료로 구전되어왔다.

 

마을에 도는 전염병을 지켜내려고 처마 밑에 걸어 두었던 마른 쑥을 태워 연기를 내며 예방을 했다는 순수하기만 했던 이야기가 시대를 넘어 구전의 의학지에 남겨져 오늘날까지 남아서 또 다음 세대를 만나 현대의학을 돕고 있다. 오늘날 강조하는 정신력 치유처럼 그때는 무술의 힘도 있었다. 무당의 힘을 빌려 무술로 병마를 쫓아내는 힘도 그 시대 속 역병을 이겨낸 의학지 속 이야기를 사극으로 구전시켜졌을 때 가장 위력한 힘이 된다.

 

역사 속 이야기를 찾아 거슬러 가는 일은 또 다른 신비로움마저 있다. 누워 있는 환자 머리맡에서 주문하며 병의 근본인 귀신을 몰아냈다는 기록도 재미있게 들려진다. 그런 순수하고 어진 병마 이야기 속의 지금 세상이 아니다. 두렵고 어두운 이야기를 떨쳐 버리려 옛 사람의 모습으로 목욕 재개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정기검진을 받으러 집을 나선 지 채 몇 분도 안 되어 시야에 펼쳐지는 광경 속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엉클어지고 굴곡진 빛의 세상을 걷는다.

 

마스크를 하고 기다리는 많은 환자들이 이미 다른 세상을 향해 떠나가는 모습만 같다. 닥터의 진료를 기다리는 공간 속 벽에 붙여진 인체의 해부도 사진이 모든 사람들을 미라의 흉골로 만들어 다른 세상으로 내몰 준비를 할 것 같다. 그 시절 사람들도 지금의 나처럼 똑같은 신체적 구조다. 그때 알려지지 않은 의술의 지혜로움은 지금의 의술에 비하면 더 신비롭고 신중하게 바라보게 한다. 그때보다 더 뛰어난 의술로 사람의 몸속을 노려보는 오늘의 의술도 그때의 신비로움 앞에서 아무런 손도 못 쓰고 있다.

 

누군가 말하기를 여자는 심적으로 변화를 갖게 될 때 머리를 자른다고 말한, 그 사람은 모르고 하는 소리 같다. 검은 머리를 지닌 사람은 모두가 그 생리를 지니고 태어났기에 심리적 변화가 요동칠 때면 의학적으로 머리를 자르고 싶어질 것 같다. 남자는 머리가 길어지고 단정치 못하면 마음의 폭동이 일어난다. 사람들마다 지니고 태어난 인내의 유전자가 다르다 해도 요즘처럼 사회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두어야 한다는 말부터 모든 사람들의 유전자는 물론 세상 생태계마저 뒤죽박죽으로 혼란을 부르는 것만 같다.

 

이발소를 찾은 지가 오래다. 히피족처럼 장발을 하지 못해 안달을 하던 모습의 옛날 사진을 보면서 견디려 해도 쉽지가 않다. 역병이 순순히 물러갈 기미가 없는 현실 속에서 나의 머리를 깎아주던 미용사 멕시칸 깔로스는 지금 어느 하늘아래서 다시 돌아올 날을 손꼽아 세고 있을까. 깔로스도 피해를 입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은 지금, 그 누구에게도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할것 같다.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내가 미용사가 되어 나의 머리를 깎기로 한 결심으로 하나씩 역병의 운명을 이겨가야겠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세상과 타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전기 바리깡에 끼운 클립 하나만 믿고 나는 거울 앞에서 한치의 불만조차도 남김없이 머리를 밀어버렸다. 거울 없이 머리를 깎아내린다는 각오로 눈을 감고 밑에서 위를 거슬러 오르며 깔끔하게 깎아버렸다. 순간 거울 속 나를 찾아내 새로운 내 모습을 보니 정신이 맑아졌다.

 

산사의 여름을 찾아 소슬바람이 대밭을 스치는 암자에서 머무는 스님의 머리처럼 정갈한 자세를 지킬 것 같다. 중이 제 머리 깎을 수 없다는 말도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다. 전설의 소리처럼 아름다운 스님 이야기도 형편없이 모두를 못쓰게 하는 역병의 혼란 속을 나는 머리를 깎아낸 스님의 의지로 지켜보고 싶다. 제한된 공간을 지켜야 하는 일이 죄인처럼 갇혀 산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마음먹기 달렸다.

 

수행을 위하여 행동반경에 내 스스로 제한을 두는 수양관에서의 규칙적인 생활표를 이행하며 산다는 생각으로 사는 게 옳을 것 같다. 매 순간 들이마시지 못하면 생명을 이어갈 수 없는 공기에 감사함을 그동안 모르고 산 염치없는 대가가 아닌가 생각하면 언제 내 폐를 공격할지 모르는 공포에 대하여 그 또한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그렇게 내 손으로 머리를 깎고 탁발중처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다.


[글 문경구] kimurgin@hotmail.com

​전명희 기자


전명희 기자
작성 2020.10.16 11:13 수정 2020.10.1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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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