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가을이 익어가는 사량도 지리산

여계봉 선임기자


통영 사량도 지리산을 등반하기 위해 아침 일찍 대항마을 숙소에서 산행 들머리가 있는 돈지마을을 향해 출발한다. 면사무소가 있는 금평마을을 지나 돈지마을로 가는 해안 일주 도로 옆으로 푸르스름한 방광이 일고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는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작은 어촌의 아침을 깨우는 파도는 기운이 없어 모래사장과 조약돌만 소리 없이 적시고 있다.


가을이 익어가는 지리산 옥녀봉. 오른쪽으로 상도와 하도를 잇는 사랑대교가 보인다.


사량도는 혼자가 아니어서 좋다. 통영의 남쪽 바다에 위치한 사량도는 상도와 하도가 동서로 나란히 누워있다. 사량도의 옛 섬 이름은 박도였다. 위에 섬은 '상박도'였고 아래 섬은 '하박도'였다.

 

섬은 산이다. 그래서 사량도는 산의 기세가 웅장하다. 섬과 기암괴석과 바다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사량도의 지리산은 국내 100대 명산 중 하나다. 그래서 이 섬을 방문하는 사람은 10명 중에 8명은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다. 오늘은 상도의 4개 산봉우리를 모두 통과하는 종주코스인데, 돈지마을-지리망산(398m)-볼모산(390m)-가마봉(301m)-옥녀봉(303m)-금평항까지 총 8km이며, 5시간 정도 소요된다.

 

 

산행기점인 돈지분교. 왠지 폐교만 보면 서러운 생각이 든다.


산자락의 스님이 쌓았다는 등산로 초입의 돌탑. 산에 오르면 ‘무사등반’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돈지마을에서 산 능선을 따라 오르면 병풍처럼 돈지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촛대봉 전망대에 도착한다. 단풍이 시작된 기암괴석의 산자락은 해안가에 치마폭을 담그고 있고 돈지항 해안에는 은빛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간다. 은빛 모래 위에 잠시 써보았던 사랑의 흔적들. 돈지항 앞바다는 빈자리를 채우러 또 다른 사랑이 달려오고 있다. 산을 내려가서도 산에서 만난 사량도의 바다 풍경들을 기억하리라.

 

정상으로 가는 능선에 올라서면 농가도와 수우도가 옅은 해무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다.



뭍에서 바람타고 넘어온 단풍은 섬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다.

사량도 정상인 지리산과 1m 높은 불모산은 높이가 비슷한 데다 주릉 좌우로 천 길 낭떠러지로, 두 산 모두 산정에서 맛보는 경관이 탁월하여 굳이 높이로 정상을 따질 필요가 없다. 힘이 들면 펼쳐진 바다를 보고, 능선의 소나무에 눈을 밝히며 쉬엄쉬엄 걷는다. 대항마을에 얹힌 해무처럼 무심히 어쩌지 못한 저잣거리 삶의 한 사연도 여기서는 접어두자. 촛대봉에서 종잇장 바위로 된 암릉 구간을 1시간 정도 걸어서 지리산(398m)에 당도한다. 날씨가 화창하면 저 멀리 있는 진짜 지리산까지 조망할 수 있지만 오늘은 아니다.

 

지리산 정상. 지리산이 보인다하여 지리망산으로 불렸는데 어느 순간 ‘망’자가 사라져 버렸다.

 

이곳 섬 산행은 낭떠러지 절벽과 급경사의 등산 코스로 유명하다. 전문적으로 산을 타는 산악인들도 깎아진 산 능선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아찔한 곳이다. 사량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불모산(399m) 까지 가는 도중에 가파른 암반과 해송 숲들이 경쟁하듯 등장한다. 눈 아래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바다를 보면 마치 업경대 같이 느껴져서 늘 마음 한구석이 아파온다.

 

불모산(달바위) 가는 암릉길. 지리산은 작지만 매서운 곳이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다 하여 이름 붙여진 불모산을 거쳐 가마봉에 오르면 고동산을 사이에 두고 대항해수욕장과 사량대교가 한 눈에 보인다. 지리산의 산행의 대미는 가마봉과 옥녀봉 구간이다. 해발 400m 정도 되는 봉우리들을 연결한 출렁다리와 90도 경사에 가까운 수직의 철 계단을 타고 옥녀봉으로 향하는 재미는 쏠쏠하다. 출렁다리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밧줄과 수직계단을 이용하여 가마봉에서 내려와 다시 바위를 타고 옥녀봉에 오르는 것이 힘들고 위험한 코스여서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공룡의 등뼈 같은 암릉 능선을 따라 가마봉으로 향한다.


지금은 우회 산길과 철제난간, 나무계단을 만들고 출렁다리까지 생겼으니 예전만큼 짜릿한 스릴을 느끼지 못하지만 험한 산세는 여전하다. 발 아래로 보이는 산과 바다가 펼치는 파노라마에 산객은 잠시 넋을 잃는다. 어찌 산이 변할 것인가. 어찌 바다가 변할 것인가. 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푸르고 아득하다. 고깃배들이 하얀 포말의 선을 긋지만 이내 지워진다. 바다를 가슴에 담아서 저잣거리에 돌아가서 삶이 힘들거나 가슴이 답답하면 사량도 바다를 꺼내보리라.


출렁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이 일대의 경관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다.


산행 내내 펼쳐지는 수려한 풍광은 옹골차기 그지없다. 갈수록 새롭게 펼쳐지는 풍광에 이끌려 가파른 바위를 수십 번 오르내리지만, 발걸음은 오히려 가볍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암릉, 경사가 급한 벼랑을 지날 때마다 정신이 아찔하고 오금이 저린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너른 바다와 사량대교 너머 하도의 산그리메는 참으로 멋있다.


가마봉과 옥녀봉 구간은 지리산 산행의 대미를 장식한다.


통영팔경의 하나인 사량도 옥녀봉에는 애절한 전설이 하나 전해 온다. 아주 먼 옛날 사량도 옥녀봉 아래 작은 마을에 옥녀가 태어났다. 운명이 기구하여 옥녀가 조실부모하자 이웃에 살던 어떤 홀아비가 옥녀를 입양하여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세월이 흘러 어여쁜 여성으로 성장한 옥녀는 미모가 아주 뛰어나 주변에 소문이 자자했다. 이즈음 옥녀를 길렀던 의붓아버지는 옥녀를 딸로 보지 않고 여자로 생각해 탐하려하자 옥녀는 마을 뒷산 봉우리에 올라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열여섯 피지 못한 꽃봉오리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슬픈 사연이 깃든 옥녀봉을 건너편의 하도가 어루만져주고 있다.

 

 

섬 이름 '사량(蛇梁)'은 이곳 옥녀봉에 얽힌 비련의 설화에서 연유되어 '사랑''사량'으로 변천되었다는 설과 섬에 뱀이 많이 서식했다는 설 그리고 섬의 형상이 뱀처럼 기다랗게 생긴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데, 선택은 본인 몫이다.

 

옥녀봉에서는 일곱 봉우리가 이어진 하도의 칠현산이 잘 보인다. 옥녀봉이 그리우면 다음에는 칠현산에 올라 옥녀봉을 바라봐야지. 사량도 관문 금평마을로 내려서는 숲길은 가파르지만 안온하다. 산행을 함께한 동무들 두 눈에는 사량도 바닷물이 든 듯 푸른빛이 감돈다.

 

금평항 포구에서 붉은 태양이 사량도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앉을 때까지 저 장중한 자연의 침묵하는 교향악을 숙연히 바라본다.


통영 미수항으로 가는 페리에서 바라본 사랑대교


페리를 타고 사량대교를 지나자 하도 칠현산과 상도 옥녀봉이 작별 인사를 건넨다.

상도와 하도 부둣가에는 낚시꾼들이 사량바다에서 가을을 건져 올리고 있다.

 

사량도에는 가을이 익어간다.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11.02 11:40 수정 2020.11.02 12:00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편집부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2025년 4월 25일
2025년 4월 25일
전염이 잘 되는 눈병! 유행성 각결막염!! #shorts #쇼츠
2025년 4월 24일
2025년 4월 23일
2025년 4월 22일
나는 지금 '행복하다'
2025년 4월 21일
2025년 4월 20일
2025년 4월 19일
2025년 4월 18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6일
2025년 4월 15일
2025년 4월 14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