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들은 말에 미국에는 칠십여 개국 이상의 다른 인종들이 살고 있다는 소릴 들은 것 같다. 헤아려 보지는 않았어도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를 멜팅팟이라고 괜히 말했겠는가. 그 멜팅팟 속에서 만들어지는 요리처럼 저마다 좋은 특유의 삶의 철학으로 가꾸는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것에 나는 늘 기다려지는 기쁨 같은 게 있다. 나는 한국인으로 선뜻 동양 사람인 일본 사람과, 중국, 월남 등 조금이나마 한국과 근접한 뻔한 아시아 국가 사람들과 가장 친근할 것 같고 정이 더 갈 것 같은데 아니다.
문을 나서면 제일 먼저 아르메니안 쥴리가 보인다. 아르메니안들은 우리처럼 이웃과 나누어 먹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처음 알았을 때 억센 억양 속에서 서로의 인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그들도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커다란 역사의 상처가 있었듯 터키로부터 받은 학살의 고통이 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우리의 따뜻한 정이 그렇게 포개졌다. 무언가 주면 번갯불 속도로 무엇인가 들고 와 함께 웃는다. 쥴리가 그렇게 내 어린시절 고사떡을 이웃에게 나르던 때를 기억나게 해준다.
옆집 그리스에서 이민 온 로즈가 안녕하고 말할 때는 늙은 그레이스켈리 버금가는 얼굴을 연상케 한다. 그녀 아니면 누구도 입을 수 없는 빛바래고 낡을 대로 낡은 레이스가 달린 옷으로 고개 한번을 돌려도 우아와 도도함을 전한다. 정이라고는 싹 깎아 낸 듯 차갑게 보이지만 이웃끼리는 다정하다.
강보에 덮인 핏덩이 알라를 입양해 오던 백인 말리샤를 보면 나는 그녀가 사랑스럽다. 내가 이 세상에 남아있을 시간을 이십 년만 허용해 주신다면 아기를 입양하여 젖은 깃털이 말라 내 곁을 떠나가는 새처럼 키우고 싶었던 꿈을 대신 만족시켜주는 말라샤의 딸, 알라가 훌쩍 크면서 내게 허그를 할 때마다 뭉클함이 있다. 생일날 재미 삼아 준 나의 그림을 엄마인 말리샤와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액자를 해 끼웠다고 나를 초대해 보여줄 때 내가 사는 빌딩 속에 엄마 천사와 아기천사가 나와 함께 살고 있음을 보았다.
동양인이 유난히 말라붙은 공간 속에 살면서도 그들과 어우러져 사는데 늘 힘이 있고 재미있으니 절대로 그들은 꿩을 대신하는 닭이 아니다. 언제나 꿩들이 들려주는 합창이 즐겁다. 나를 포함한 그 인종들의 카테고리 카드 속에서도 나는 선뜻 멕시칸을 뽑아내고 싶다. 괜히 밉지 않아서 떡 하나 더 주고 싶은 정이 간다. 그들에게 어쩌면 치명적일 것 같으면서 가장 가깝게 신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르는 두 가지 길이 있다. 그들은 후자인 신께서 내려 주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삶의 철학을 넘어 신앙처럼 여기며 산다.
더 이상 조여 맬 허리가 없도록 일 만하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희한한 말이다. 내일 어떻게 될 것 인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오늘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살자는 말이 나는 듣기 좋다. 그들도 여느 민족처럼 한도 울분도 있지만 내일 걱정은 내일 가서 생각하자는 삶의 방식이다. 고민해 보았자 해결되지 못할 인생사를 품고 내일까지 가져갈 게 뭐 있냐고 한다. 하루 노동의 대가로 먹을 빵을 구입하는 그들의 행복한 얼굴은 신 외에는 못 만든다. 내일 먹을 빵의 몫은 내일 일한 돈으로 마련하면 충분하다.
배만 빵빵하면 살사춤이 저절로 나온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내게 유독 필요하다. 그들이 사는 곳은 허름한 아파트일수록 내게 정취를 더 느끼게 한다. 백 년쯤 지난 것 같은 덕지덕지 덧바른 페인트가 정겹다. 작대기를 게워 논 아래위로 여닫는 낡은 창문 밖으로 빨래줄에 널린 여인들의 손빨래가 얌전하게 줄지어진 멋진 풍경이 있다.
근처에는 꼭 하나 두 개쯤 주인의 미움을 받다가 결국엔 관심밖에 난 화초가 나가 자빠져 누워있다. 그 천박한 여건에서 억척스럽게 버려진 대로, 굽어진 대로 살아난 목숨을 이룬 모습이 예술적이다. 화원에서 상품 가치를 하기 위해 일등급으로 놓여진 쌩쌩한 화초들 모습보다 내게는 더 예술적이다. 언제나 그곳에 가면 나의 그림 세계를 위한 영감이 떠오를 것 같아 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발을 구른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고급 콘도의 내부에 놓인 화초는 잘 가꾸고 키도 크고 예쁘지만 억지춘향 같아 늘 보기가 그랬다.
그런 잘생긴 가구들, 금수저 같은 화초가 있는 고급스러운 공간보다 나는 텁텁한 먼지 냄새가 나는 공간에서 사랑을 더 느끼고 싶어진다. 화려함은 나와 다소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멕시칸들에게서 풍기는 순수함은 신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특별한 선물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서로 각각의 얼굴 중에 공통으로 특별함이 있다. 도대체 신은 누구는 저토록 멋지고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어떻게 우리는 꽉 짠 행주눈의 얼굴을 만드셨냐는 불만이 그들을 보면서 하게 된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들의 눈이 유독 그렇다. 아무리 못난 꼴도 눈값은 꼭 하고 있다. 진한 쌍꺼풀에 움푹한 눈으로 껌벅일 때마다 지는 석양 속 낙타 속눈썹 같은 눈으로 다른 인종을 바라보는 눈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것은 진흙탕같이 혼탁한 세상도 맑게 바라보라는 삶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눈만큼은 아름다운 세상의 창을 갖게 하신 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그들이다. 처음 미국 생활에서 본 그들의 무슨 밀가루 손수건 같은 것에 싸아 먹는 음식은 게으른 사람이 성의 없이 만든 음식처럼 이상하게만 보였다. 과연 나는 그런 음식을 먹을 수 있냐고 피하던 멕시칸 살사는 꼭 엎질러 놓은 양념을 다시 주워 담은 것 같아 어떻게 친숙해질 수가 있겠냐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음식들 모두 안 줘서 못 먹는다.
내가 즐겨 먹는 멕시칸 비빔밥인 “토스타다” 앞에 앉으면 어떻게 먹어야 할지, 바삭한 비빔밥 그릇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떼어먹어야 할지 먹을 때마다 고민이 깊어진다. 살아가면서 면역력이 강해지는 게 그들의 삶 같다. 하늘은 그들과 나에게 똑같은 분량의 우울함을 주셨는데 이상하게 그들의 몫은 아주 작아 보인다. 똑같은 크기의 고독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명 받았는데 그들의 것은 늘 없어 보였다. 감당하지 못할 고독, 우울함이라면 차라리 그들처럼 즐기며 산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흉본 만큼 같아진다고 한다는데 더 많이 더 빨리 닮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한 나는 두
나라 속의 짬뽕 같다. 이루지 못한 인생이라고 후회할 일이 하나도 없다. 그들의 철학처럼 내일도 신용 못 하면서 이루지 못한 어제 일로 머리 싸맬 필요 없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내 몸이 깃털처럼 가벼운지 모른다. 애초에 눈물의 씨앗을 뿌리는 법을 모르고 오직 웃음의 꽃을 피우는 씨앗밖에 없다는 그들의 철학이 부럽다.
내가 할 수 있는 스페인어 한마디는, ‘노마냐나’ 내일은 없다이다. 오직 오늘뿐인 거다. 그런 태평양 같은 마음으로 푼수처럼 언제까지 살 거냐고 묻는다면 그들에게는 없다는 내일이라고 말할 거다.
[문경구]
미주한인크리스찬문학협회공모 수필당선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