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거울이다. 손때 묻은 자그마한 손거울.
나도 모르는 사이, 얼굴 언저리에 이랑처럼 깊이 패인 중년의 모습, 그 구겨진 세월의 흔적들을 아무 꾸밈없이 되 비춰주는 손거울이다. 이 나이 먹도록 무얼 했나 하는 자괴감도, 아무리 해도 고쳐지지 않는 못된 심성의 부끄러움도, 자꾸 주저앉고 싶은 삶의 무기력증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따뜻한 애정의 눈길로 담담히 되 비춰주는 손거울, 바로 그 때 묻은 내 누님의 손거울이다.
수필은 달이다. 사막 한가운데 휘영청 뜬 하얀 달.
자동차 매연에 찌든 도심의 하늘이 아니요, 검은 폐수로 썩은 도시의 강도 아닌 청정 사막.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그 광활한 사막의 자유로 높이 뜬 달이다. 도둑들이 성자의 웃음을 웃고, 모리배가 해탈의 표정을 짓고 사는 세속의 위선과 불의를 괴로워하며 홀로 뜨는 달, 바로 그 의(義)로운 사막의 혼을 지키는 달이다.
수필은 조약돌이다. 냇가에 씻긴 해맑은 돌.
세상 사람들은 제가끔 제일 큰 몫을 차지하려고, 눈을 부릅뜨고 큰 것들을 좇아 다닐 때, 있는 그대로의 작은 모습으로 분수를 지키는 조약돌이다. 푸른 수초 사이로 흘러가는 물줄기의 속삭임. 그 위에 비늘처럼 반짝이는 햇살의 몸짓. 선한 눈을 가진 물고기들의 대화를 숨죽이고 귀 기울여 듣는 돌, 바로 그 가장 작은 자연의 소리를 마음으로 듣는 조약돌이다.
수필은 편한 신발이다. 허물없는 친구가 오면 끌고 나가는 내 신발.
백화점 전시용으로 금장식이 요란스레 달린 구두도 아니요, 볼이 좁아도 정장에 꼭 구색 갖춰 신어야 하는 검정 신사화도 아닌 그저 물이 새는 내 신발. 답답한 속마음이나 내 궁색한 모습, 있는 그대로 내보여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주는 옛 친구 같은 헌 신발, 바로 그 오랫동안 청계천 진창길을 함께 비집고 걸어온 내 편한 신발이다.
아! 수필은 내 어머니의 손길인 것을....
어린 우리들 옹기종기 앞에 놓고 뚝뚝 수제비를 빚으시던 손. 겨울바람에 갈퀴같이 터졌어도 내 아픈 배 만지시면 비단 솜처럼 부드럽던 손. 세상 돌 더미를 헤치고 어쩌면 내게 꼭 맞는 꿈의 보석을 찾아내시던 손. 미움에서 사랑을, 분열에서 화합을 가르치시던 손. 내 상처받은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시던 그 치유의 손. 사랑의 손....
아픈 영혼이 쉴 수 있는 내 어머니 손길 같은 수필을 난 어느 천년에나 쓸 수 있으랴?
[김희봉]
서울대 공대, 미네소타 대학원 졸업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캘리포니아 GF Natural Health(한의학 박사)
수필가, 버클리 문학협회장
제1회 ‘시와 정신 해외산문상’ 수상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