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저녁을 마치고 헤어지며 인사 뒤로 비치는 캘리포니아의 석양빛은 언제 보아도 신비롭다. 그 신비의 옷을 몸에 걸치고 차에 오르는 친구의 모습도 분명 또 다른 이름으로의 황혼이다. 저 친구처럼 나의 황혼도 아름답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머금은 채 차 안에 앉는 순간 나는 황혼보다 더 떨리는 모습을 보았다.
초라한 뒤태의 노인이 어정어정 건너편 떡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순간 나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였다. 지금쯤 뿌려드린 태평양 바다로의 여행 중이실 아버지가 어떻게 저기 계실 수가 있을까. 아버지하고 부르며 차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바로 그 순간 내 몸의 모든 장기가 플라스틱 샘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버려 손안에서 멈춰질 것같은 심장 하나만을 쥐고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버지가 나오시기만을 기다려야겠다. 분명 생전에 좋아하시던 쑥절편떡 하나를 사가지고 나오실 거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당신의 큰아들 그늘에 가려져서 늘 찬밥이라고 하던 작은 아들인 나는 아버지에게 얼마나 섭섭함이 많았었던가.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나는 그 잘난 형 때문에 이리 채이고 저리 받히기에 딱 좋은 심심풀이 심부름꾼밖에 되지 않는다고 얼마나 징징대었던가.
늘 나는 신발 벗고 뛰어도 느긋한 형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불문의 문자는 귀에 화석처럼 박혀있었다. 그런데 지금 왜 이렇게 들숨과 날숨의 혼란스러운 심장을 쥐고 아버지가 나오시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이상하다. 무슨 말이던 내가 드리면 늘 콧방귀를 끼시고 큰아들 말에는 조금만 섭섭하셔도 그날 저녁 수저도 들지 않으셨을 때마다 일찍 가신 어머니가 그리워 흘린 눈물은 아직도 내 안에서 서슬 퍼렇게 출렁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차의 시동도 걸지 못하게 하고 시린 가슴을 쓸어안게 만드시려고 오신 건 왜일까. 그렇게 벌벌 떠시던 큰아들이 놓아드린 수저 한번 잡아보지 못하시고 떠나신 야속함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 걸까. 아니면, 혹시 그렇다면, 만에 하나 큰아들 집을 찾으셨다가 아버지 제사상에 물조차도 못 떠올린 형일 거라는 눈치를 이미 알아차리셨던 걸까. 그렇다면 자식 하나 바라고 송죽 같은 절개로 홀아비 삶을 사셨던 아버지에게는 너무 잔인한 일이다.
아버지의 이 모든 사생활을 알았을 때는 이미 내 곁에 안 계시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시간뿐이라고 말씀드릴 거다. 그러니까 그것은 시효가 지난 아버지 세상의 권한 밖의 몫이니 인제 그만 미련을 두지 마시라고 해야겠다. 아무튼, 나오시기만 기다렸다가 자초지종을 알아야겠다. 만약 신께서 나를 위해 아버지를 잠시 이 세상으로의 외출을 허락하셨다면 참 잘된 일이다. 가게에서 나오시는 데로 신께 속히 도움을 청할 거다.
곧 아버지가 다시 당신의 별나라로 떠나시기 전에 내게 남은 반생이란 시간과 아버지가 갖고 계신 순간의 생과 바꾸어 달라고 할 거다. 아버지가 이승에 남으시고 내가 대신 저승으로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애원할 거다. 그뿐이 아니다. 신께서 안심할 수 있게 남부럽지 않은 나의 재정보증도 제시할 거다. 나머지 몫 반생을 더 머무르시는데 아무 어려움 없이 호강만 하시게 모든 재산을 담보로 나 없는 세상에서도 어떤 외로움의 두려움도 모르시며 사시게 할 거다.
그렇게 속절없이 가신다는 것은 아버지의 도리가 아니라고 만류하던 나를 냉정하게 돌아서신 아버지의 그 섭섭함을 모두 풀어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기회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아버지께 아무도 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절을 드릴 거다. 사무치게 드리고 싶었던 큰절의 소원을 이루고 말 거다.
물론 황혼의 석양 뒤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신 신께도 그 감사함을 절대로 모른 척하지 않을 거다. 도착하는 대로 무엇이 되든 섭섭지 않은 선물을 할 거다. 그런데 왜, 나는 이만큼의 완벽한 결심 앞에서 망설이는 걸까. 뻔한 아버지 콧방귀 소리가 듣기 싫어서일까. 지겹다던 아버지의 콧방귀 소리가 왜 이 순간에 사무쳐져 미친 사람이라도 되어 바닥에 뒹굴고 싶은 걸까.
이제까지 황혼의 석양은 아름다움이 전부 일 줄 알았는데 숨겨진 내면에 이런 잔인함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어디, 어느 별로 가셨을까 찾아낼 수 없는 아버지의 발자국 속에는 삶에 죽음이 있고 또 그 안에 삶이 있다는 것만 알려주시려고 잠시 오셨던 것 같다. 생전에 좋아하시던 쑥떡절편뿐만 아니라 갖가지 떡들을 손에 가득 쥐어 드리고 싶은데 왜 나는 지금 빈 떡 봉지에 눈물만 가득 채우며 서 있는 걸까. 아직 열기가 남아있는 석양빛도 저녁노을도 바라볼 염치조차 없으니 모두 돌려 보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떠나야 한다. 영원히 머문 곳이란 절대로 없다. 제아무리 저녁노을이 세상무대를 화려하게 꾸며준다 해도 돌아갈 줄 알아야 하는 거다. 아버지처럼 떠난 뒤에는 신께 구차하게 아쉬운 부탁드리는 일도 어차피 부질이 없다. 이미 다른 세상 속의 타인이 되신 아버지의 사생활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문경구]
미주한인크리스찬문학협회공모 수필당선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