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이고 무정한 페도라 백작부인에게 미칠 듯한 욕망을 쏟아 붓고 마지막 금화를 팔레 루아얄 도박장에서 날린 젊은 라파엘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모없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하고 다리에서 떨어지기 전, 골동품 점에 들러 특이한 노인으로부터 나귀 가죽을 건네받는다. 나귀 가죽은 지니의 요술램프처럼 소원을 들어주는 보물 같은 거였는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소원을 들어줄수록 그 대가로 수명이 줄어든다는 거였다.
생명의 소멸을 짊어진 나귀 가죽을 믿지 않았던 라파엘은 첫 번째 소원으로 호화찬란한 바쿠스의 야회를 빈다. 그리고 그를 찾아다닌 친구들에게 붙들려 막대한 재산을 가진 타유페르가 베푼 연회에 참석해 그가 누리는 부귀영화를 부러워하며 아무리 열렬하게 쏟아 부어도 밑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알아주지 않는 페도라 백작부인에 대한 사랑의 공허함을 토로하고 물질적풍요로움을 외친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소원대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친척으로부터의 막대한유산을 상속받는데 나귀 가죽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라파엘은 살아 있는 미라처럼 공허해진 육체 안에 피폐해진 정신을 가두고 욕망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
나귀 가죽이 라파엘의 첫 소원을 이루어 준 순간부터 그의 죽음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춰 종말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입에서 나온 몇 마디로 욕망은 채워지나 가죽은 줄어들며 남겨진 생의 순간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줄어 들었다. 살기 위해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무기력하고 공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수 나귀 가죽의 진면목을 모를 때는 하루를 살더라도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려보고 싶다던 라파엘은 살고자 하는 욕망 앞에서 철저하게 본능대로 움직인다. 화려하고 멋진 한 달의 인생보다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이더라도 기나긴 삶을 원했던 것이다.
나귀 가죽’의 원제인 ‘La Peau de chagrin’에서 'chagrin'은 ‘가죽’이라는 의미 외에도 '슬픔, 번민'이라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어 ‘슬픔이 갉아먹는 목숨’이라는 의미를 감추고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 ‘라파엘 발랑탱’을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지만, 사실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인간의 ‘욕망’이다. 소설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정확하고 명료하다 . '당신의 욕망에대가를 치르라!' 나귀 가죽은 그것을 소유했던 라파엘 발랑탱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나귀 가죽을 소유한 발랑탱처럼 총량이 정해진 욕망을 우리는 과도하게 쓰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를돌아봐야 한다. 하루에도 각자의 나귀가죽에게 몇 개의 소원을 빌고 있는지 말이다.
[민병식]
인향문단 수석 작가
대한시문학협회 경기지회장
문학산책 공모전 시 부문 최우수상
강건 문화뉴스 최고 작가상
詩詩한 남자 문학상 수필 부문 최우수상
2020 코스미안상 우수상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