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에게 띄우는 제2신(信)

이태상

 

 

안녕하십니까.

저는 트위터에 문외한(門外漢)이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2020124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인용 보도된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글을 읽고 2년 전에도 공개서신을 드린 적이 있는 독자로서 이렇게 다시 몇 자 적습니다.

 

"외모는 딱 내 취향인데 인격은 그렇지 못한 여자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참 서글퍼진다. 보고만 있어도 서글프니 깊이 엮이면 훨씬 더 서글플 것이다라고 하루키는 자신의 트위터에 밝혔다.”

 

이것이 어디 여자에게만 적용(適用)되는 일이겠습니까. ‘남자에게도, 모든 인간에게 해당(該當)하겠지요. 그리고 인격(人格)’이란 고정(固定)된 것이 아니고 유동성(流動性)이 있어 신격(神格)’으로 승화(昇華)할 수도 수격(獸格)으로 전락(轉落)할 수도 있지 않던가요.

 

벌써 두 분 다 세상을 떠냐셨지만 나에게는 누나가 둘 있었습니다. 내가 다섯 살 때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자 국민학교(초등학교)만 겨우 마치면 집에서 살림이나 배워 시집가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누이들은 집안 식구 아무도 모르게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고 돈 안 드는 사범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에서 소풍 가는 전날 밤이면 누이들은 밤을 꼬빡 새워 8.15 ‘해방후 배급된 미국의 구호물자 설탕 가루로 눈깔사탕을 만들어 소풍날 친구들에게 팔아 용돈으로 쓰곤 했지요. 작은 누이는 영양실조로 자고 나면 얼굴이 퉁퉁 붓기까지 했습니다. 밥솥 누룽지조차 누이들에게는 차례가 못 갈 정도였으니까요.

 

노래를 잘하는 큰누이는 교회 성가대원으로 다른 교회로 독창 하러 불려 다니기도 했는데 성가대를 지휘하는 찬양대장이던 목사님 아드님과 연애한다고 어머니가 누이 머리칼을 가위로 다 잘라버려 머릿수건을 쓰고 학교에 다닌 때도 있었습니다. 간신히 학교를 졸업하고 큰누이는 국민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6.25 사변 때 타이피스트로 미군부대에 취직, 거기서 한국군 통역장교이던 매형을 만나 식도 못 올린 결혼을 했습니다.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 출신인 매형이 고시 공부하겠다고 군에서 일찍 제대하고 공부하는 동안 다시 교편생활로 돌아간 누이가 여러 해를 두고 힘겹게 생활을 꾸려나갔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몸이 약하던 매형이 결핵 폐병까지 앓게 되자 남편의 법학 책값뿐만 아니라 약값까지 누이가 마련해야 했습니다. 누이의 극진한 간호로 매형의 병은 완쾌되었으나 운()이 없었는지 매형은 고등고시(高等考試) ‘고시(高試)’에 번번이 낙방(落榜)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5·16 쿠데타가 나자 혁명 주체세력이던 같은 경상도 고향 친구들의 천거로 발탁되어 감투를 하나 쓰게 되자 그토록 점잖고 가정적이던 남자가 돌변(突變), 처자식들을 버리고 바람이 났습니다. 그때 나에게 하소연하러 찾아오신 누님을 나는 위로해드리기는커녕 몹시 섭섭하게 해드렸던 것이 아직까지도 나의 마음에 걸립니다. ‘매형이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참았었지, 나 같으면 옛날에 바람이 나도 수백 번 났을 거라며 누이 보고 제발 살림살이와 애들 키우는 데만 정신 팔지 말고 얼굴과 머리도 좀 잘 다듬고 옷차림에도 신경 쓰시라고, 말과 행동을 좀 더 부드럽고 아름답게 하시라고, 그리고 매형의 몸과 마음과 혼을 누이의 극진한 사랑과 정성으로 사로잡아 보시라고, 냉정하고도 건방지게 나는 한바탕 훈시(訓示) 아닌 훈시, 설교(說敎) 아닌 설교를 해댔지요.

 

그러면서 어려서부터 들어온 아버님 이야기를 누님께 상기시켜 드렸답니다. 아버님께서는 다음날 출장을 떠나시면서도 어서 주무시라고 해도 그 다음날 기차에서 주무시면 된다고 하시면서 바느질하시는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늘에 실을 꿰어주시며 어머님과 함께 밤을 꼬박 새우시곤 했다는 얘기를요. 그도 그럴 것이 아버님이 잡숫고 난 다음에야 남기신 반찬을 애들에게 주셨다고 할 정도로 어머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아버님을 위해 드렸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다 하고, 생과부가 된 큰 누이는 어린 자식들 넷을 데리고 갖은 고생하며 살다 못해 하와이에 사는 작은 누이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지요. 그러자 때마침 그동안 썼던 감투가 떨어져 나가 별 볼 일 없게 된매형은 다른 여자가 낳은 딸 아이 하나까지 데리고 누이와 함께 이민 길에 올랐습니다.

 

나보다 두 살 위의 작은 누이는 유학 중에 미국의 동양학자와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한국주재 미 공군 근무를 마친 후 1963년 네덜란드 라이덴대학에서 몽고의 한국 침략(Korea, The Mongol Invasion)’이란 학술논문(저서)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프린스턴대학의 첫 한국학 학자로 재직했습니다. 그 후로 하와이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동서 문화센터의 한국학회를 창설한 미국의 대표적인 한국학자로 그는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에도 능통했지요. 그는 한국역사(A History of Korea)’라는 영문으로 쓴 첫 한국역사책을 집필했고, () 고려대학교 총장 유진오 박사가 지어준 한국 이름 현순일(玄純一)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남편의 연구논문 작성에 내조하면서 영한 회화사전 ‘EVERYDAY KOREAN: A Basic English-Korean Wordbook’도 펴내며 바삐 지내던 누이가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시간이 좀 나자 부동산 매매 라이센스를 얻는 공부를 해 부동산 중개인 리얼토(Realtor)가 되었습니다. 본래 말수가 적고 빼어난 외모에다 마음 씀씀이 크고 신의가 두터우며 침착한 성품 때문인지 누이는 부동산 세일즈를 썩 잘했습니다. 부동산 중개 커미션 수수료 (그 당시) 6%에서 소속된 브로커 회사에 3% 떼어주고 남는 3%로 누이가 한 주에 버는 돈이 대학교 교수 남편의 일년 연봉보다 많아지자 남편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니면 돈에 대한 욕심이 생겼는지 저명한 학자로서의 경력과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부동산 중개업 브로커 라이센스를 취득해, 누이와 같이 부동산 중개업 회사를 하나 차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개인 주택 세일즈만 하던 누이의 평판이 좋아지자 큰 개발업자들이 경치 좋은 해변에 콘도미니엄 분양 맨션아파트 등 수백 채씩 짓기 시작하면서 그 세일즈를 누이한테 다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누이가 받아오는 세일즈 계약금으로 콘도 건설공사를 마칠 수가 있었지요. 이렇게 큰 콘도단지, 고급별장, 호텔 등을 취급하면서 누이네 세일즈가 날로 늘어났습니다. 미국 본토뿐만 아니라 유럽, 남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으로부터 걸려오 는 국제 전화 한 통으로 큰 덩어리 부동산 매매가 이루어지게까지 되었지요. 남편은 사무실만 지키고.

 

누이는 오십여 명의 리얼토를 거느리고 백방으로 뛰었지요. 이처럼 몇 년을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뛰다 보니 누이네는 억만장자에 가까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토록 갑자기 돈이 많이 생기자 계모 밑에서 자라다 소년 시절 집을 뛰쳐나가 상선(商船) 선원(船員)으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 후 미국 정부 장학금으로 명문대학을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 톱클래스 동양학자가 되었던 남편이 돈 쓰는데 신바람이 났습니다. 주말이면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하룻밤에 몇만 불, 몇십만 불, 몇백만 불씩 날리며 놀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누이는 돈 벌기에 정신없었고 남편은 돈 쓰기 바빴지요. 보다 못해 남편에게 거의 모든 재산을 떼어주고 이혼한 누이는 두 아들을 키우면서 사업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떼어 받은 재산을 몇 년 안에 다 탕진하고 알거지 신세가 된 전() 남편이자 애들 아버지가 하도 가련하고 비참해 보여 인정이 많았던 누이는 다시 남편으로서가 아니고 애들 아빠로 집에 들였는데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변()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영국에 살고 있던 나는 어느 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지요. 누이가 가파른 비탈길에서 누이 자신이 몰던 차에 깔려 죽는 꿈이었습니다. 잠을 깨서 이상하다 했는데 전보를 받았습니다. 노모(老母)를 작은 누이가 모시고 있었기에 연로(年老)하신 어머님이 돌아가셨구나 하고 전문(電文)을 읽어본 나는 기가 딱 막혔지요. 꿈에서처럼 누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통보였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장례식에도 참석지 못하고 후에 큰 누이한테 서 들으니 작은 누이는 아침 일찍 애들이 다니는 호놀룰루의 명문 사립학교 푸나후(나의 큰 외조카는 오바마 전 대통령과 동급생이었음)에 데려다주고 아침나절에 변을 당했는데, 고급별장을 짓는 어느 바닷가 절벽으로 오르는 아직 포장 안 된 비탈길에서 누이는 자신이 몰던 차에 자기가 깔려 죽어 있는 것을 지나가던 행인이 오후에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고 합니다. 1982년 일입니다.

 

이 일을 당하기 전에도 작은 누이가 그 당시 콜로라도주() 덴버()시에 사시던 큰 누이에게 전화로 전() 남편 빌(William의 약칭Bill)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것 같다고 말했었답니다. 어떤 때는 작은 누이의 자동차 트렁크에 살인용(殺人用) ()가스 같은 것을 채워놓기도 했다면서 틀림없이 작은 누이가 전 남편의 청부살인(請負殺人)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 같다고 큰 누이는 내게 말했습니다.

 

작은 누이가 세상 떠난 3년 후 큰 누이 꿈에 굉장히 크고 화려한 대저택 아름다운 수많은 꽃이 피어 있는 정원에 아들 둘하고 같이 있는 작은 누이가 보이더랍니다. 두 조카도 옛날과는 달리 아주 화평(和平)한 얼굴을 하고 있더랍니다. 반갑고 부러운 마음에서 큰 누이가 작은 누이에게 , 태순(泰順), 나도 너의 집에 와 살 수 없겠니? 너의 집 방도 많은데, 나 방 하나만 쓰게 해주렴이라고 했더니, “언니, 그러면 좋을 텐데 이 집에 들어오려면 패스포트가 있어야 해하더랍니다.

 

이 꿈으로 미루어 보아 두 조카까지 그들 아버지가 누이가 두고 간 재산이 탐나 또 역시 청부살인을 시키지 않았을까? 잠시 의문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작은 누이가 죽기 전에 전 재산을 두 아들에게 준다는 유언장을 만들어 놓았었다지만 미성년이던 애들의 생부(生父)로서 그들의 법적인 후견인이었을 테니까 애들이 둘 다 죽고 나면 그 재산이 애들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작은 누이가 세상 떠난 후로 조카들과도 소식이 끊겨 여러 해를 두고 백방으로 찾아보던 중 최근에서야 연락이 되어 내 둘째 딸 수아가 칼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로 찾아가 제 두 사촌들을 만나보았습니다. 한창 사춘기 때 엄마 아빠가 다투는 걸 보면서 심한 조울증을 앓게 된 형을 동생이 잘 보살피고 있더랍니다. 작은 누이가 세상 떠난 지 10년 후 1993년 나의 전() 작은 매형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두 분의 명복을 함께 빌었지요.

 

이어서 나의 세 어머니이야기도 좀 해 보겠습니다. 94세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을 말년에 나는 시설 좋은 뉴욕 맨해튼에 있는 유대인 양로원(Nursing Home)에 모셨는데 별세하시기까지 정신도 말짱하셨습니다. 매주 한두 번 방문했는데 어머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한 주 전에 태상아, 네 외할머니 너한테 안 오셨니?”라고 물으시더군요. 그 당시 나는 흑인들이 많이 사는 뉴저지주() 오렌지시()에서 가발(假髮)가게를 하나 하면서 가게 뒤에 있는 헛간 같은 곳에 군용(軍用) 야전침대(野戰寢臺)를 하나 놓고 혼자 지낼 때였습니다.

 

어머님,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나는 반문(反問)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할머니를 뵌 적도 없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분이었으니까요. 그랬더니 어머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 외할머니가 내게 오셨길래 난 괜찮으니 태상이한테 가셔서 수발 좀 들어주시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 다시 찾아뵈었을 때 어머님께서 네 외할머니께서 다시 오셨기에 난 정말 괜찮으니 제발 태상이한테 가서 좀 돌봐주시라고 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런지 이틀 만에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병원에 계신 동안 어머님을 극진히 간호해준 한국인 간호사가 내가 세 번째로 결혼해 31년째 같이 살고있는 현재 나의 아내입니다. 어쩌면 내 외할머니께서 XX이라는 여인으로 나에게 나타나 주셨는지 모를 일입니다. XX는 인천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오빠 한 명이 있었지만 장녀(長女)로서 어머님과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 둘을 돌보는 소녀가장(少女家長)이 되었답니다. 고학(苦學)하며 중학교를 마치자 학비가 안 드는 간호고등학교에 진학해 간호사가 되었지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줄곧 반장을 하던 똑똑하고 예쁜 XX은 부반장을 하던 남학생을 그가 공군사관학교에 다닐 때부터 사귀게 되었답니다. 그러다 XX이 서독 파견 간호사로 2년 계약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서독에 가서도 휴일도 없이 낮번 밤번 이중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버는 돈을 다 한국으로 송금했고 남자친구와는 편지로만 서로의 그리움을 달래면서

 

계약 기간이 끝나가자 XX는 큰 고민에 빠졌다고 합니다. 한국에 돌아오면 공군 소위와 결혼하게 될 텐데 남자 쪽도 집안 형편이 어려운지라 더 이상 친정을 도울 수 없는 까닭에서였다고요. 더구나 바로 밑의 여동생이 사춘기 때부터 정신이상이 생겨 경제적인 부담이 커지고 있을 때였답니다. 깊은 고민 끝에 그야말로 심청이가 따로 없다고 가족을 위해 자신의 첫사랑까지 포기하고 친구의 소개로 (그 당시) 서독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병사를 만나 결혼해 미국으로 오게 되었지요.

 

후일담(後日談)이지만 깊은 실연(失戀)의 늪에서 빠져나온 남자친구는 XX를 이해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민 후 다시 XX를 만나보고 평생의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 공군소장까지 되었다가 퇴역했습니다. 한편 XX는 결혼한 남편이 미군에서 제대하고 직장을 가지려 하는 것을 만류해 대학에 진학시켰습니다. 영어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고 미국의 간호사 자격증도 없이 간호사가 아닌 간호사 보조원으로 밤낮으로 일하면서 딸 둘을 낳아 키우다 보니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남편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였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지방 신문 기자가 된 남편이 술친구 부인과 바람이 났답니다.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XX는 어린 딸 둘을 데리고 뉴욕으로 올라와 머리 싸매고 영어사전으로 단어 하나하나 뒤져가면서 의학서적을 독학으로 외우다시피 해서 정식 간호사 Registered Nurse가 되었지요. 이혼하면서 전() 남편으로부터 받기로 된 양육비도 한두 달 받다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큰딸은 정신과 전문의 그리고 작은딸은 교육자로 아주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애들한테는 어려서부터 아빠에 대한 좋은 점만 얘기해주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빠와 가까이 지내도록 방학 때마다 아빠의 새 부인한테 줄 선물까지 들려 보내곤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전 남편 시댁 식구들 경조사까지 꼭 챙기면서 친하게 지내오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에 있는 친정 식구들을 다 미국으로 초청해 오빠와 남동생은 세탁소를 경영케 하고 막내 여동생은 공부시켜 시집 보내고 바로 밑의 동생은 정신장애자들 보호시설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쯤 해서 지지난해 가을 (날짜는 정확히 기억 안 납니다만)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하루키 무라카미 작가님에게 드리는 제1()으로 올가을 출간된 영문판 코스미안 랩소디 (Cosmian Rhapsody)’에 실린 글 ‘An Open Letter to Mr. Haruki Murakami’를 아래와 같이 옮겨 드립니다. 이 우생(愚生)의 졸문(拙文)을 아직 못 보셨을 경우, 망중투한(忙中偸閑)으로 일독해주십시오.

 

Dear Mr. Haruki Murakami,

 

Today I read your interview article with Sarah Lyall of The New York Times (October 10, 1018) and I was impressed. I agree with you that “a book is a metaphor.” You expressed my cherished thoughts so poetically.

 

I do like your statement very much : “If you close your eyes and dive into yourself, you can see a different world. It’s like exploring the cosmos, but inside yourself.” Wow, you were speaking for me too!

 

All the while, living my life for eighty-two years, I’ve never dreamed that there would be a day like today, one day. Looking back, had I not lost my first love almost sixty years ago, I could not have come to realize that I, and all others, all beings, are “cosmos” born “arainbow” from the Cosmos. A young boy who happened to fall in love with the micro-cosmos of a flower ended up embracing the whole of the macro-cosmos.

 

Your answer was: “I don’t have to dream, because I can write,” when you were asked at the end of the interview: “What do you dream about?” You said: “I’m a realistic person, a practical person, but when I write fiction, I go to weird, secret places in myself. What I am doing is an exploration of myselfinside myself.”

 

In my case, I didn’t have to write fiction, because I’ve been living my dreams, being aware from early on that facts were stranger than fiction and that life itself was but a dream, As published author of 27 books (including 5 translations: Thomas Mann’s ‘Transposed Heads’ and Kahlil Gibran’s ‘The Prophet,’ ‘The Garden of the Prophet,’ ‘Spirits Rebellious,’ and ‘The Nymphs of the Valley”) all in Korean except three in English, ‘Cosmos Cantata,’ ‘Cosmian’ (to be published in 2019)’ and ‘Cosmian Rhapsody’ (to be published in 2020) all based on my own life.

 

I couldn’t agree more with Ralph Waldo Emerson when he said: “Use what language you will, you can never say anything but what you are.” Ever since my earliest child- hood, I aspired to write on the invisible sheet of life with the pen of living in the ink of blood, sweat and teardrops of love, and I’m still striving on.

 

I am writing this letter, seeking your help, perchance, through your huge readership, in reaching out to find a Japanese lady whom I have forsaken almost fifty years ago and to whom I’m dying to extend my belated apologies and explanation before I expire, if I could by any remotest chance.

 

Unlike you, I’ve usually been an unrealistic and impractical person except as to this lady, which became my lifelong regret and shame. I don’t know if there is a similar saying in Japan as in Korea: ‘Make sure you build a Great Wall with a lady even if you sleep with her only for one night.’

 

In 1970, I visited Japan for the first time to attend a busi- ness conference in Tokyo. Capitalizing on my off duty free time for a couple of days, I went to Kyoto and Nara for sightseeing after visiting the Osaka Expo. Upon arriving at the Kyoto train station, I approached a young lady in the plaza and making use of my poor Japanese, I asked her for some directions.

 

As it turned out, she was at the train station plaza to meet her sister, and saying a goodbye to her sister, to my infinite surprise, she offered to be my guide for the day. How could I resist this undreamed of ‘romantic tour’ with such an attractive young lady? As if in a sweet dream, the whole day passed by in a blink of an eye. Even more surprising was her kind invitation for dinner at her home. After dinner with her friends and me, she accompanied me to the train station. She even came down to the platform to see me off after buying me some cookies and candies from the gift shop at the station.

 

I was taking the night train for Tokyo to fly back to Seoul the next morning. During the short flight, I was in agony, not knowing what to do. It may have been just a friendly goodwill kindness on her part, nothing more and nothing less. But as far as I was concerned, this was a case of ‘all or nothing’ and ‘now or never.’

 

I did not let her know that I was a married man with two children. Since she didn’t ask me, I felt it’d be presump- tuous and rude of me to tell her I was not available. More likely, though, how I wished that I were a ‘free man!’ After much struggle between my head and my heart, just moments before disembarking from the airplane, I tore up and threw away the note she handed me with her name and address written on it. I justified and rationalized my action by telling myself: “It’s all for her. I don’t want to give her any ‘false hope.’ The sooner she forgets about me, the better off she will be to find a suitable, unattached, eligible bachelor.”

 

Burning that bridge to her once and for all had to be the best decision that I could make for her, even though it was the worst for me, I thought.

 

Tragi-comically enough, soon after my return home, my wife and I got divorced due to our irreconcilable differences. Our marriage was an accident in the first place. We had sex under the influence of alcohol one night without having had a date. In those days, ‘one-night-stand’ was unheard of. I felt responsible and we married.

 

As soon as we got divorced, we learned that she was pregnant with our third child. So we remarried for the sake of the children. After trying harder eighteen more years, we got divorced again for the second time, twenty years after our first wedding.

 

In my earliest days, I started devouring great people’s biographies and reciting their sayings. Thus brainwashed and hypnotized, I convinced myself that I was a big fire, not a small one easily extinguished even by a breeze, like an eternal star that starts to shine as soon as the sky is dark enough, or like a kite that rises highest against the wind, not with it.

 

I forced myself to live by ‘sollen’ in Geman meaning ‘ought to be’ in English. However, I’ve come to realize, only after so many trials and errors, that one cannot go against the nature of things, that is, ‘sein’ in German meaning ‘to be’ in English. What will happen, will; what will not, won’t, no matter what. I’ve come to the conclusion that for anything to happen anytime anywhere, the whole Cosmos has to conspire.

 

If I had failed to build the Great Wall of our blink-brief romance half a century ago, I pray, with your assistance, I might be able to rebuild the bridge between us, at long lasteven if it may be between our tombstones with a copy each of the Japanese edition of my book in Korean ‘우린 모두 성신(星身/) 코스미안이다 We all are Cosmians born as star body/soul (to be published in 2020) and of ‘Cosmian Rhapsody’ in English,(to be published also in 2020), to be laid at hers for a bouquet, if you are so kindly inclined to translate these two books, my 26thand27th.

 

Gratefully,

 

Lee Tae-Sang

 

정녕, 누구와 만났다가 헤어진다는 것이 그 어느 누구의 뜻과 섭리에서인지 알 길 없지만 사랑의 사자(使者) 큐핏의 수많은 화살을 한 가슴에 연거푸 맞고 신음(呻吟)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 이 사랑의 독침(毒針)을 맞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도 실연(失戀)의 가시덤불 속에서 남몰래 소리 없이 몸부림 맘부림 치면서 피눈물 흘려 왔습니다. 붉은 피가 창백해지도록 말입니다.

 

작가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이 쓰도록 맵도록 새콤달콤한 사랑의 미약(媚藥)을 맛보고 이 사랑의 마술(魔術)에 한 번 걸리면 아무도 그 마법(魔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랑만을 위해 살든지 죽든지 하라 이 같은 사랑의 절대적인 지상명령(至上命令)을 거역할 수 없지 않던가요.

 

사랑과 삶이

또 죽음까지도

연인들에게는

같은 이상(理想)

같은 현실(現實)

같은 진실(眞實)

다시 말해

섹스와 사랑과 삶이

삼위일체(三位一體)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인종과 국적, 신분과 계층, 재산과 학벌, 또는 연령, 모든 것을 초월하는 연인들의 정사(情事)는 물론 때로는 정사(情死)까지 가능한가 봅니다.

 

그렇다면 이 어인 일일까요?

 

장밋빛 인생은

가시덤불

장밋빛 사랑은

꿈속의 사랑

 

이것이 정말 사실일까요?

정말로 그렇다면 어째서일까요?

 

스탕달(Stendal)이란 필명의 프랑스 작가 마리-앙리 벨(Marie-Henri Beyle 1783-1842)이 그의 소설 연애론(On Love)’에서 말했듯이 네 살, 내 살 모르도록 네 몸, 내 몸, 네 마음, 내 마음, 따로 없이 한 몸 한 맘으로 한데 꼭 붙어 한 덩어리로 희희낙락(喜喜樂樂) 즐겁게 노는 남녀 쌍쌍이를 보고, 사랑의 신()인지 여신(女神)이 배가 아파 괴로워했겠지요. 신성(神聖)한 하늘나라 대궐에서 신들이 벌이는 패권(覇權) 다툼보다 비속(卑俗)한 세속(世俗)의 속인(俗人)들 오막살이 사랑놀음, 사랑놀이가 훨씬 가 좋아 보였을 테니까요.

 

인간들이 이렇게 행복하다 보니 신들을 찾거나 섬기려 들지 않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보다 못해 심술이 난 사랑의 신인지 여신이 시기심과 질투심에서 인간 남녀 쌍쌍이를 죄다 분리(分離)시켜 세상에 흩뿌려버렸겠지요. 옛날부터 한 나라의 통치자나 세계 강대국이 백성과 약소국가들을 이간(離間)시켜 내분(內紛)과 분쟁(紛爭)으로 이들을 거세(去勢)시켜 가면서 통제(統制)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리해서 우리 인간 모두가 다 이산(離散)가족이 되어 누구나 다 반쪽으로 사랑 때문에, 사랑에 굶주리고, 사랑에 병들고, 사랑에 미쳐 그토록 고통을 당하고 슬픔을 참아내며 각자 잃어버린 제 짝을 찾아 헤매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좋거니, 그래도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미칠 바에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에 미치느니 차라리 사랑에 미쳐보리라고

 

망언다사(妄言多謝)

 

2020125

미국 뉴저지주()에서

이태상(李泰相) 드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전명희 기자



전명희 기자
작성 2020.12.05 10:52 수정 2020.12.0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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